이개는 조선전기 집의, 집현전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56년(세조 2)에 사망했다. 이색의 증손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제정에 참여했으며 단종의 스승으로서 세자를 잘 지도해 달라는 문종의 간곡한 부탁을 받기도 했다. 계유정난 후 환관을 공신에 책정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다가 사직을 청했으나 불허되었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한 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복권되고,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 國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 · 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했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 · 하위지(河緯地) · 유응부(兪應孚) · 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 때 이개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 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 홍모(鴻毛: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 현릉(顯陵: 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이 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慥)도 단종 복위의 모의에 참여해 자결하였다.
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이개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방안에 켜져 있는 촛불 누구와 이별을 하였기에 겉으로 눈물 흘리고 속 타는 줄 모르던가 저 촛불 나와 같아 속 타는 줄 모르는구나.”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