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절서원 ()

유적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후기 숙종대에 창건한 서원.
이칭
이칭
민절사(愍絶祠), 의절사(義節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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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후기 숙종대에 창건한 서원.
개설

1681년(숙종 7)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노량진 하가차산리(下加次山里)에 설립되었다. 이후 1691년(숙종 17) 12월 민절사(愍絶祠)라고 사액되었다가 1692년(숙종 18) 1월 서원으로 고쳤다. 조선 후기 사육신(死六臣)을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역사적 변천

1681년(숙종 7) 9월 서울과 지방의 사림이 연대해서 사육신(死六臣)의 제향을 위해 사당으로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 상량문은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찬술하였다. 1691년(숙종 17) 9월 국왕이 김포 장릉(章陵)에 거둥하는 길에 노량진을 들러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묘와 영월 노산대군의 묘에 치제하였다. 이어서 사육신의 복권과 함께 같은 해 12월 민절사라고 사액하였다가 1692년(숙종 18) 1월에 서원으로 고치고 3월에 복관 고유제를 거행하였다. 이후 정조나 고종 등이 치제문을 내리는 등 국가적 관심 하에서 관리되었다.

내용

서원이 건립되던 숙종대 전반기에는 사육신의 복권과 관련해 전기가 되던 시기이다. 서원 건립에 앞서 1679년(숙종 5) 9월 허적(許積)이나 권대운(權大運)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육신묘에 대한 봉식(封植)이 이루어졌다. 1680년 12월에는 강화유수 이선(李選)이 복권 문제를 제기했으며, 1681년 7월에는 노산군이 노산대군으로 호칭이 격상되었고 묘의 위판도 지위에 맞게 개수되었다. 민절서원은 이 같은 상황에서 설립된 것으로, 성삼문 · 박팽년(朴彭年) ·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을 배향하였다. 1694년(숙종 20) 박태보(朴泰輔)와 오두인(吳斗寅)을 민절서원에 합향(合享)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시대가 같지 않고 일도 다르다는 이유로 허가되지 않았다.

특징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그 터에 의절사(義節祠)라는 사당과 오석으로 제작된 6각의 ‘사육신지묘비’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사육신의 복권 이후 이들을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 중 한 곳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장릉지(莊陵志)』
「숙종조의 사육신 추숭과 서원제향」(정만조, 『한국학논총』 33,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10)
「16~18세기 ‘단종복위운동’ 참여자의 복권 과정 연구」(이근호, 『사학연구』 83, 한국사학회, 2006)
「숙종대 단종 추복의 정치사적 의미」(윤정, 『한국사상사학』 22 한국사상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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