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심호(心湖). 전라남도 해남 출신.
1942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를 중퇴하고 1946년 광주 호남신문사 문화부장, 1948년 서울연합신문사 문화부차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이후 전북대학교 · 원광대학교 · 숭실대학교 · 서라벌예술대학 · 성신여자사범대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69년 한국문협(韓國文協) 시분과위원장, 1973년 문협 사업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40년 6월 『조광(朝光)』에 시 「귀농(歸農)」 · 「상렬(喪列)」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46년 시집 『네 동무』를 발간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작품은 1950년 서정주(徐廷柱)의 추천을 받아 『문예(文藝)』지에 「황혼(黃昏)」 · 「새댁」 · 「혼야(婚夜)」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51년 제2시집 『혼야』를, 1955년 제3시집 『강강수월래』를 발간하였다.
그의 시작품의 특성은 한국적 정서에 기반을 둔 향토적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특성은 1964년 『문학춘추(文學春秋)』에 발표된 「현대시와 서정의 문제」를 통해서도 잘 대변되고 있다.
이 밖에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였으며, 1967년 이후는 ‘실명소설(實名小說)’이라는 소설의 분야를 개척하여 「박종화」(현대문학, 1967.2.) · 「김영랑」(현대문학, 1967.3.) · 「유치환」(현대문학, 1967.4.) 등 한국 저명 문인들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장흥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유고집으로는 시선집 『산조』(우일문화사, 1979), 실명소설집 『빛에 싸인 군무(群舞)』(문예비평사, 1979) 등이 있다.
1980년 전라남도 대흥사 입구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1952년에 전라남도문화상, 1960년에 한국문협상, 1962년에 5월문예상 장려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