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삼(子三), 호는 낙계(駱溪). 중종의 서자 덕양군 이기(德陽君 李岐)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봉래군 이형윤(蓬萊君 李炯胤)이며, 어머니는 증참판(贈參判) 최행(崔行)의 딸이다. 이식(李植)의 문인이다.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3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관리로 선발된 뒤 정언이 되었다. 효종 승하 후 모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대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논쟁에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1년설이 채택되자,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도를 탄핵했고, 이어 장령이 되어 다시 남인의 거두인 허적(許積)을 배척하다가 삭직되었다.
1668년(현종 9) 다시 등용되어 태상시정(太常寺正)·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초기에는 사간이 되어 성학(聖學) 권장, 인재의 선발, 언로(言路) 개방, 선비 양성, 둔전제 폐지, 군정(軍政) 개혁 등을 역설하였다.
또 송나라 철종(哲宗)의 고사를 인용해 선조(先朝)에서 견책받은 신하들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때 곽세건(郭世楗)이 서인을 일망타진하려는 소를 올리자, 곽세건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해 사림(士林)의 사기를 북돋우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의 집권 세력인 남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양주의 장리(庄里)에 은거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기용되어, 사성을 거쳐 사간·태복시정·청풍부사·집의·공조참의·우부승지를 지냈다. 그 뒤 호조참판을 지내고, 지돈녕부사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능하였다. 시호는 장정(莊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