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조부는 함안이씨 시조인 이상(李尙)이고, 아버지는 이원(李源)이다.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되었고,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전(田) 100결(結)도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대호군이 되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서 민란을 일으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 부자를 쳐서 진압하였다.
1359년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 등의 홍건적이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 정주(靜州)·인주(麟州)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鐵化)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뒤이어 상만호가 되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고선주(古宣州)에서 접전한 끝에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했을 때 풍주(豐州)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이 하사되었다.
1361년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홍건적이 20여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오자, 추밀원부사로서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 지휘사 김경제(金景磾) 등과 함께 개주(价州: 지금의 개천)·연주(延州: 지금의 영변)·박주(薄州: 지금의 삭천) 등지에서 요격했다. 그러나 안주와 절령(岊嶺)에서 참패해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1362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사유·관선생을 죽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金鏞)의 간계에 의해 공민왕의 명을 받은 박춘(朴椿)정지상(鄭之祥) 등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