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명보(明甫). 아버지는 선전관 장응익(張應翼)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키는 팔척이며, 특히 힘이 뛰어났다. 평소 유학에 뜻을 두어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였다.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활쏘기와 말타기에 전념, 1582년(선조 15) 무과에 급제하여 북도 변장을 제수받았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간호하다가 1588년에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고 훈련원정을 거쳐 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의병부장(全羅左義兵副將)이 되어 장수현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다가 성산(星山)·개령(開寧)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에 진주성을 지키는 목사 이하의 장수들이 적에 눌려 도망하려 하자 비분강개하여 군졸 200명을 휘동하여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혈전의 주장이 되어 최전단에서 사병과 함께 용전하였다.
대장 황진이 적탄에 전사하니 뒤를 이어 대장이 되어 8주야를 적과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마침내 진주성도 함락되었다.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순천의 정충사(旌忠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