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 출신. 1919년 초에 개최된 파리평화회의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이루어지자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그곳 국제회의에 반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국 유림대표가 그곳 회의장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계획하고 곽종석(郭鍾錫) 등 137인이 이에 연서하자, 그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서울 일대의 3·1운동이 영남 지역으로 발전하자 각 지방을 은밀히 돌면서 서울의 격렬한 독립시위운동을 전파, 격려하였다. 그러나 일제 헌병의 잔혹한 무력 저지로 활동이 억제당하자 동삼성(東三省) 지방으로 망명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을 시작하자 안창호(安昌浩) 등과 제휴하여 국내 연통제 조직을 위임받았다. 국내로 들어와 동지를 포섭하고 함경남북도 지방 내 10여 개 군에 이 조직을 완료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다.
1920년에 감시하던 일본경찰에 붙잡혀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만기 출옥하였다.
그 뒤 동삼성으로 건너가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동삼성 봉천(奉天)·목단강성(牧丹江省)·해림청산리(海林靑山里) 등지에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개원(開原) 주재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복역을 마치고 강원도 횡성으로 거주를 옮겨 은신한 뒤 다시 함경도 일대로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중경(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를 송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붙잡혀 다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용정형무소에서 복역 중 7개월 만인 1943년 12월 27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