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복겸(鄭福謙)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이며, 어머니는 원계채(元繼蔡)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 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政房)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합계(合啓)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때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柳氏)는 그의 생질녀로, 옥사가 일어날 때에는 혹 광해군이 그에게 묻기도 하여 옥사에 억울하게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