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

경제
개념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
내용 요약

조운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이다. 전근대시기에 각 지방에서는 조세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송운송로를 따라 중앙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산지가 많아 육로운송이 어려워 남서해안의 바닷길과 한강·예성강 등의 수계가 주로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화폐 유통 활성화에 따른 조세 금납화 현상이 확대되면서 조운제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어 19세기 말에 소멸하였다.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
개설

조운(漕運) 제도는 전근대시기 각 지방에서 조세의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운으로 중앙의 경창에 운송하는 제도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활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개의 조창이 설치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9개 조창, 조선 후기에는 8개 조창이 운영되었다. 조운으로 운송되는 세곡은 국가 재정의 중추가 되었으므로, 중앙정부에서는 안전한 조운의 운송과 운송 중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다양한 제도와 법규를 운영하였다. 조선 후기에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면서, 조운제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어, 조운제도는 19세기 말에 소멸하였다.

연원

조세의 명목으로 거둬들이는 곡물은 화폐 유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시기 왕조 국가의 가장 주요한 재정 기반이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곡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수도의 창고로 운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해운(海運)이나 강운(江運)을 통하여 세곡(稅穀)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조운의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의 경우 조운 제도의 기원이 서기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수 · 당 시대에 대운하의 개통과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조운의 활용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고려시대의 조운

우리 역사에서 조운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고려사』 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는 건국 초기부터 12조창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조창은 조세곡을 수납하여 모아두는 곳이며, 조창이 위치한 포구에서 조운선에 세곡을 선적하여 경창으로 운반한다. 그러나 국초부터 12개 조창 모두가 한꺼번에 운영되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고, 각 조창별로 설치 시기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992년(성종 11)에는 전국 60개 포구에서 개경까지 세곡을 운송하는 수경가(輸京價)가 제정되었다. 즉 당시에는 수경가가 지정된 60개 포구가 주변 지역의 조세를 수납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조창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60개 포구 중 9곳은 고려 13조창 중 9개 조창이 위치했던 포구와 동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60포의 수경가와 현재 기준 지역 범위 등은 [표 1]과 같다.

[표1] 992년(성종 11) 설정 60포(浦)의 수경가(輸京價)

수경가(輸京價)

해당 포구(지역, 조창)

지역 범위(현재 기준)

5 석당 1 석

통조포(通潮浦)【예전 명칭은 말조포(末潮浦). 사주(泗州) 통양창(通陽倉) 이 위치】

나포(螺浦)【예전 명칭은 골포(骨浦). 합포현(合浦縣) 석두창(石頭倉) 이 위치】

경상남도 남해안

6 석당 1 석

파평포(波平浦)【예전 명칭은 부사포(夫沙浦). 낙안군(樂安郡)에 위치】

조양포(潮陽浦)【예전 명칭은 사비포(沙飛浦). 승평군(昇平郡) 해룡창(海龍倉) 이 위치】

풍조포(風調浦)【예전 명칭은 마서량포(馬西良浦)】

해안포(海安浦)【예전 명칭은 마노포(麻老浦). 광양군(光陽郡)에 위치】

안피포(安波浦)【예전 명칭은 동조포(冬鳥浦). 조양현(兆陽縣)에 위치】

이경포(利京浦)【예전 명칭은 소정포(召丁浦). 여수현(麗水縣)에 위치】

여수포(麗水浦)【예전 명칭은 금천포(金遷浦). 대원군(大原郡)에 위치】

은섬포(銀蟾浦)【예전 명칭은 섬구포(蟾口浦). 평원군(平原郡)에 위치】

전라남도 남해안,

충청북도 남한강 상류

8 석당 1 석

조동포(潮東浦)【예전 명칭은 신포(薪浦). 영암군(靈岩郡) 장흥창(長興倉) 이 위치】

남해포(南海浦)【예전 명칭은 목포(木浦). 통의군(通義郡)에 위치】

통진포(通津浦)【예전 명칭은 치을포(置乙浦). 나주(羅州) 해릉창(海陵倉) 이 위치】

덕포(德浦)【예전 명칭은 덕진포(德津浦). 무안군(務安郡)에 위치】

곤강포(崐岡浦)【예전 명칭은 백암포(白岩浦). 음죽현(陰竹縣)에 위치】

황려포(黃麗浦)【예전 명칭은 황리내지(黃利內地)】

해위포(海葦浦)【예전 명칭은 위포(葦浦). 장연현(長淵縣)에 위치】

전라남도 서해안 남부,

북한 황해남도 서해안

9 석당 1 석

이통포(利通浦)【예전 명칭은 굴내포(屈乃浦). 합풍군(合豐郡)에 위치】

여섭포(勵涉浦)【예전 명칭은 주을재(主乙在). 희안군(希安郡)에 위치】

부용포(芙蓉浦)【예전 명칭은 아무포(阿無浦). 영광군(靈光郡) 부용창(芙蓉倉) 이 위치】

속통포(速通浦)【예전 명칭은 소진포(所津浦). 승화군(承化郡)에 위치】

조종포(朝宗浦)【예전 명칭은 진포(鎭浦). 임피군(臨陂郡) 진성창(鎭城倉) 이 위치】

제안포(濟安浦)【예전 명칭은 무포(無浦). 보안군(保安郡) 안흥창(安興倉) 이 위치】

고총포(古塜浦)【예전 명칭은 대모포(大募浦). 안산군(安山郡)에 위치】

서하군포(西河郡浦)【예전 명칭은 풍주(豐州)】

전라남도 서해안 북부,

전라북도 서해안,

북한 황해남도 서해안

10 석당 1 석

징파포(澄波浦)【예전 명칭은 등승포(登承浦). 천녕군(川寧郡)에 위치】

안석포(安石浦)【예전 명칭은 범귀이포(犯貴伊浦). 천녕군(川寧郡)에 위치】

유조포(柳條浦)【예전 명칭은 유정포(柳頂浦). 천녕군(川寧郡)에 위치】

이화포(梨花浦)【예전 명칭은 이포(梨浦). 천녕군(川寧郡)에 위치】

녹화포(淥花浦)【예전 명칭은 화인수사포(花因守寺浦). 천녕군(川寧郡)에 위치】

장암포(丈嵓浦)【예전 명칭은 앙암포(仰嵓浦). 천녕군(川寧郡)에 위치】

양원포(陽原浦)【예전 명칭은 황진포(荒津浦). 양근군(楊根郡)에 위치】

화제포(花梯浦)【예전 명칭은 화련제포(花連梯浦). 양근군(楊根郡)에 위치】

은파포(恩波浦)【예전 명칭은 구지진(仇知津). 양근군(楊根郡)에 위치】

우산포(虞山浦)【예전 명칭은 산척포(山尺浦). 양근군(楊根郡)에 위치】

신어포(神魚浦)【예전 명칭은 소신사포(小神寺浦). 양근군(楊根郡)에 위치】

경기도 남한강 중류

13 석당 1 석

이섭포(利涉浦)【예전 명칭은 갈성포(葛城浦). 풍산현(豐山縣)에 위치】

풍해포(風海浦)【예전 명칭은 송곶포(松串浦). 해풍군(海豐郡)에 위치】

회해포(懷海浦)【예전 명칭은 거이미포(居伊彌浦). 신평군(新平郡)에 위치】

편섭포(便涉浦)【예전 명칭은 타이포(打伊浦). 아주(牙州) 하양창(河陽倉)에 위치】

충청남도 태안반도 · 아산만 연안

15 석당 1 석

미풍포(媚風浦)【예전 명칭은 부지포(夫支浦). 한남군(漢南郡)에 위치】

식랑포(息浪浦)【예전 명칭은 가서포(加西浦)】

백천포(白川浦)【예전 명칭은 금다천포(金多川浦). 대천군(大川郡)에 위치】

경기도 서해안

18 석당 1 석

상원포(尙原浦)【예전 명칭은 상진촌포(上津村浦). 회안군(淮安郡)에 위치】

화평포(和平浦)【예전 명칭은 무한포(無限浦)】

노수포(鹵水浦)【예전 명칭은 미음포(未音浦). 광릉군(廣陵郡)에 위치】

종산포(從山浦)【예전 명칭은 거지산포(居知山浦). 광릉군(廣陵郡)에 위치】

경기도 한강 중 · 하류

20 석당 1 석

덕원포(德原浦)【예전 명칭은 치음연포(置音淵浦). 광릉군(廣陵郡)에 위치】

심원포(深原浦)【예전 명칭은 과주포(果州浦)】

동덕포(同德浦)【예전 명칭은 동지포(同志浦). 회안군(淮安郡)에 위치】

심축포(深逐浦)【예전 명칭은 하치음연포(下置音淵浦). 시흥군(始興郡)에 위치】

단천포(丹川浦)【예전 명칭은 적어포(赤於浦). 시흥군(始興郡)에 위치】

서울시와 경기도 한강 하류

21 석당 1 석

조해포(潮海浦)【예전 명칭은 성초포(省草浦)】

청수포(淸水浦)【예전 명칭은 가을근실포(加乙斤實浦)】

광통포(廣通浦)【예전 명칭은 진포(津浦). 공암현(孔岩縣)에 위치】

양류포(楊柳浦)【예전 명칭은 양등포(楊等浦). 김포현(金浦縣)에 위치】

덕양포(德陽浦)【예전 명칭은 소지포(所支浦). 덕양군(德陽郡)에 위치】

영석포(靈石浦)【예전 명칭은 소근포(召斤浦)】

거안포(居安浦)【예전 명칭은 거을포(居乙浦). 김포현(金浦縣)에 위치】

자석포(慈石浦)【예전 명칭은 감암포(甘岩浦). 김포현(金浦縣)에 위치】

서울시와 경기도 한강 하류

60포의 수경가에서는, 한강 수운을 이용하는 포구의 수경가가 해운을 이용하는 포구의 수경가보다 비쌌다. 그 이유는 강을 운행하는 조운선이 바다를 운행하는 조운선보다 적재할 수 있는 세곡의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조창제

고려 초기 60개 포구에 분산되어 있던 조창의 기능이 12조창으로 집중된 시기는 현종 연간(1009~1031)으로 추정되며, 12조창제는 문종 연간(1046~1083)에 13조창제로 확대되었다. 고려시대 13개 조창의 명칭과 위치는 [ 표 2]의 내용과 같다.

[표2] 고려시대 13조창과 현 위치

조창 명칭 현위치 수세(收稅)지역
충주 덕흥창(忠州 德興倉) 충북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양광도 충주와 주변 지역
원주 흥원창(原州 興元倉)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양광도 원주와 주변 지역
아주 하양창(편섭포)[牙州 河陽倉(便涉浦)] 경기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양광도 공주, 천안 등과 주변 지역
부성 영풍창(富城 永豊倉) 충남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양광도 홍주(현 홍성), 서산 등과 주변 지역
영광 부용창(부용포)[靈光 芙蓉倉(芙蓉浦)] 전남 영광군 법성면 입암리 전라도 영광과 주변 지역
승주 해룡창(조양포)[昇州 海龍倉(潮陽浦)] 전남 순천시 홍내동 전라도 승주(현 순천), 보성 등과 주변 지역
사주 통양창(통조포)[泗州 通陽倉(通朝浦)] 경남 사천시 용현면 통양리・선진리 경상도 진주와 주변 지역
합포 석두창(나포)[合浦 石頭倉(螺浦)] 경남 마산시 합포구 산호동 경상도 금주(金州, 현 김해), 양주(梁州, 현 양산)등과 주변 지역
임피 진성창(조종포)[臨陂 鎭城倉(朝宗浦)] 전북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대명리 전라도 전주, 진례(현 금산)등과 주변 지역
보안 안흥창(제안포)[保安 安興倉(濟安浦)]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영전리 전라도 고부와 주변 지역
나주 해릉창(통진포)[羅州 海陵倉(通津浦)] 전남 나주시 삼영동・안창동 전라도 나주와 주변 지역
영암 장흥창(조동포)[靈巖 長興倉(潮東浦)] 전남 해남군 영암읍 해창리・마산리 전라도 영암, 장흥 등과 주변 지역
장연 안란창(長淵 安瀾倉) 북한 황해남도 룡연군 남창리 한천 하구 서해도 풍주(현 북한 과일군), 옹진 등과 주변 지역

정종(靖宗) 연간(1034~1046)에는 12조창에 배정할 조운선의 수를 제정하였다. 석두창(石頭倉) · 통양창(通陽倉) · 하양창(河陽倉) · 영풍창(永豐倉) · 진성창(鎭城倉) · 부용창(芙蓉倉) · 장흥창(長興倉) · 해룡창(海龍倉) · 해릉창(海陵倉) · 안흥창(安興倉) 등 서해 연안 항로를 거쳐 세곡을 운송하는 조창에는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 6척씩을 두었고, 한강 수계에 위치한 조창인 덕흥창(德興倉)과 흥원창(興元倉)에는 각각 2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과 21척을 배정하였다. 조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세곡의 보관 및 운송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며, 중앙 정부에서는 각 조창에 판관(判官)을 임명하여 세곡의 수납과 조운을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 인종 때(1122~1146)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조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체 13개 조창 가운데 남해안에 3곳의 조창을 설치하여 장거리 조운을 시행하였다. 반면 개경 북쪽에는 단 1곳의 조창만을 운영하였으므로 개경 이북 지역의 조창 운영은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3개 조창 중 양광도(충청도)와 전라도에 7개 조창이 위치하여, 두 지역의 조창 설치 비율이 높았다. 한편 조창의 설치와 운영에 있어서 계수관(界首官)이나 주현(主縣) 등 대읍(大邑)의 관할 영역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고려 13조창 중 연해 지역에 위치한 조창은 대체로 만(灣)의 깊숙한 안쪽 포구에 위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측면에는 지천(支川)이 흐르고 배후에는 야트막한 구릉이 놓여 있는 입지적 특성을 보였다. 구릉에는 조창 보호를 위한 방어용 성곽이 축조되기도 하였다.

조창에 수납된 세곡은 2월부터 조운을 시작하였다. 경창과 가까운 지역은 4월까지, 먼 지역은 5월까지 운송을 마치도록 하였다. 기한 내에 조운선이 출발하였으나 바람의 피해로 인하여 초공(梢工) 3명 이상, 수수(水手)와 잡인(雜人) 5명 이상이 미곡과 함께 침몰한 경우에는, 그 피해 곡식을 다시 징수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기한을 어기고 배를 출발시켜 초공과 수수의 3분의 1이 익사한 경우에는, 해당 관청의 색전(色典)과 초공, 수수 등에게서 그 피해액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고려시대 조운을 통하여 수송되는 세곡의 최종 도착지는 개경에 위치한 국영 창고인 경창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경창으로는 좌창과 우창, 대창(大倉), 용문창(龍門倉), 운흥창(雲興倉), 신흥창(新興倉) 등이 있다. 좌창은 광흥창(廣興倉), 우창은 풍저창(豊儲倉)이라고도 하며, 좌창의 별창(別倉)으로는 동강창(東江倉)이 있었다.

13세기 후반 진도와 제주도에 거점을 둔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의 조운제도 운영에 위협을 주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 수십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략은 남해와 서해의 연안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고, 고려의 조운제도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선박을 통한 조운의 운영을 중단시키고, 육지로 세곡을 운송하게 하였다. 그러나 산지가 많고 도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육운(陸運)의 방식도 세곡의 안정적인 운송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려 말기 서해안과 남해안을 통한 조운의 운영은 정상적인 작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선 전기의 조운

여말선초 ~ 세종조

왜구의 침략 위협에 놓여 있으면서도 세곡 운송의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 조운제도를 포기할 수 없었던 만큼, 여말선초의 시기에는 조운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실행에 옮겼다.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조창과 조운 시설을 방비하기 위하여, 조창 지역의 구릉지에 방어 성곽을 쌓고, 그 내부에 조창 시설이 두어지기도 하였다. 충청도의 신창(新昌) 당성(溏城), 전라도의 용안 득성창(得成倉, 龍安城이라고도 함)과 나주 영산창(榮山倉), 순천 해룡창, 그리고 경상도의 사천 통양창(通洋倉), 창원 마산창(馬山倉), 김해 불암창(佛巖倉) 등이 여말선초에 운영되었던 조창에 해당한다. 당시 조창 지역에 방어용으로 축조한 성곽을 조전성(漕轉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 득성창과 영산창을 제외한 나머지 조창들은 조선왕조 개창 전후 모두 혁폐의 운명을 맞게 되며, 조선왕조에서는 조운제도의 정비와 함께 새로운 조창들을 설립하게 된다. 전라도 용안의 득성창은 1428년(세종 10) 함열로 이전하여 덕성창(德成倉)이 된다. 남한강 수계에서는 고려시대 이래 존재하던 충주 덕흥창 옆에 경원창(慶源倉 혹은 慶原倉)이 1403년(태종 3)에 신설되었다. 같은 해 경상도 남해안의 통양창, 마산창, 불암창 등이 폐지되면서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기 위하여 경원창이 설치된 것이다. 원주 흥원창(興元倉 혹은 興原倉)은 고려시대 이래 계속 명맥을 유지하였다. 또한 남한강 수계에서는 충주 앙암(仰巖), 여흥 우음안포(亐音安浦)와 추호포(推乎浦), 천녕 이포(利浦) 등 소규모 조창들이 운영되었다. 한편 아산만 근방에서는 아산 공세곶(貢稅串)과 면천 범근천(犯斤川)이 주요 조창으로 신설되었고, 옛 하양창이 있던 경양포(慶陽浦)도 소규모 조창으로서 존속하였다. 그리고 한양 천도로 인해 황해도 지역에서의 조운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배천의 금곡포(金谷浦)와 강음의 조읍포(助邑浦)에도 조창이 신설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 조창들을 수조처(收租處)라는 명칭으로 기록하였다.

한강 수계와 예성강 수계에 위치한 조창들은 수참(水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1390년(공양왕 2)에 정몽주의 건의로 수참이 설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수참은 조창의 기능 외에 부가적으로 화물 운송 기능, 그리고 사객의 이동을 보조하는 기능 등도 수행하였다고 한다. 수참의 업무를 관장하는 관리로는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과 우도수참전운판관이 임명되었다. 좌도는 한강 수계의 수참, 우도는 예성강 수계의 수참을 관장하였다. 연해 포구에 위치한 조창에는 조전경차관(漕轉敬差官)이라 불리는 임시 외관이 파견되었다. 15세기 전반의 조창 운영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하여 어느 정도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수록된 조창은 [표 3]의 내용과 같다.

[표3] 『세종실록』 지리지에 수록된 조창과 수조처(收租處)

조창 명칭 현 위치 주요 수세(收稅)지역
충청도 충주 연천(덕흥창・경원창[淵遷(德興倉・慶源倉)]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충청도 충주와 주변 지역, 경상도 지역
충청도 충주 앙암(仰巖) 충북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강정리 충청도 충주와 주변 지역
경기도 여흥 우음안포(우만포)[驪興 亐音安浦(禹萬浦)] 경기 여주시 우만동 충청도 옥천, 영동 등 남부 내륙 지역
경기도 여흥 추호포(驪興 推乎浦) 경기 여주시 창동・하동 충청도 청안, 음죽
경기도 천녕 이포(이포진)[川寧 利浦(梨浦津)] 경기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 충청도 죽산, 진천
충청도 직산 경양포(하양창)[稷山 慶陽浦 (河陽倉)] 경기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충청도 직산, 평택
충청도 아산 공세곶(공세곶창[牙山 貢稅串 (貢稅串倉)]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충청도 청주, 공주, 천안 등과 주변 지역
충청도 면천 범근천(범근내포)[沔川 犯斤川 (犯斤乃浦)] 충남 당진시 우강면 창리・강문리 충청도 홍주, 서산 등과 주변 지역
전라도 나주 영산창(羅州 榮山倉) 전남 나주시 삼영동 전라도 나주, 순천 등과 주변 지역
전라도 함열 덕성창(咸悅 德成倉) 전북 익산시 웅포면 고창리 전라도 전주, 남원, 고부 등과 주변 지역
강원도 원주 흥원창(原州 興原倉)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강원도 원주와 주변 지역 추정
황해도 배천 금곡포(금곡포창)[白川 金谷浦 (金谷浦倉)] 북한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리 황해도 해주, 풍천 등과 주변 지역
황해도 강음 조읍포(조읍포창)[江陰 助邑浦 (助邑浦倉)] 북한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 황해도 황주, 평산 등과 주변 지역

세종조 이후

조창이 두어질 최적의 입지를 선택하기 위한 시도는 조창의 혁파와 신설, 이동 등의 방식으로 16세기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충주의 덕흥창과 경원창은 1465년(세조 11)에 혁폐되고 같은 해 인접한 곳에 신설된 가흥창(可興倉)이 그 기능을 넘겨 받았다. 15세기 중반과 후반에는 충주의 앙암, 여흥의 우음안포와 추호포, 천녕의 이포, 직산의 경양포 등 소규모 수조처의 조창 기능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북한강 수계에 춘천 소양강창(昭陽江倉)이 신설되고, 고려시대에 부용창이 위치하던 전라도 영광에도 법성포창(法聖浦倉)이 신설되었다. 16세기 후반에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전국에 9개 조창이 운영되고 있음이 기록되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9개 조창과 각 조창의 수세(收稅) 구역 등은 [표 4]의 내용과 같다.

[표4]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창

조창명칭 현위치 주요 수세(收稅)지역
충청도 충주 가흥창(可興倉)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충청도 충주와 주변 지역, 경상도 지역
충청도 아산 공세곶창(貢稅串倉)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충청도 청주, 공주, 천안, 홍주 등과 주변 지역
전라도 함열 덕성창(德成倉) 전북 익산시 웅포면 고창리 전라도 전주, 남원 등과 주변 지역
전라도 영광 법성포창(法聖浦倉)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전라도 영광, 고부, 담양 등과 주변 지역
전라도 나주 영산창(榮山倉) 전남 나주시 삼영동 전라도 나주, 광주, 순천, 영암 등과 주변 지역
강원도 원주 흥원창(興原倉)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강원도 원주와 주변 지역
강원도 춘천 소양강창(昭陽江倉) 강원 춘천시 우두동 강원도 춘천과 주변 지역
황해도 배천 금곡포창(金谷浦倉) 북한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리 황해도 해주, 풍천 등과 주변 지역
황해도 강음 조읍포창(助邑浦倉) 북한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 황해도 황주, 평산 등과 주변 지역

전라도의 영산창과 법성포창, 덕성창에는 각각 53척, 39척, 63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고, 경기좌도에는 51척, 경기우도에는 20척이 배치되었다. 경기좌도에는 가흥창과 흥원창, 소양강창, 경기우도에는 금곡포창과 조읍포창이 소속되었다. 공세곶창에 배치된 조운선의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조선시대 서해의 연안 해로를 따라 경창으로 운항하는 조운선박의 근무자는 조졸(漕卒) 혹은 조군(漕軍)이라고 하였으며, 한강과 예성강 수로 상의 조창에 소속된 조운선박의 근무자는 수부(水夫)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 조졸의 경우, 정원은 5960명이었다.

조선시대 조창의 지리적 입지는 동일 지역에 위치했던 고려시대 조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외해(外海)와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토사의 축적으로 인한 포구 지형의 변화 역시 조창 입지 변화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수참이라고 불렀던 강변 조창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특징이 있었으나, 충주 가흥창을 제외한 강변 조창은 18세기 초반까지 모두 폐쇄의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창 중 일부도 변동이 발생하였다. 함열의 덕성창은 1487년(성종 18) 다시 용안으로 이동하여 득성창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득성창 역시 1512년(중종 7) 폐쇄되고 옥구 군산포에 새로 지어진 군산창(群山倉)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나주 영산창은 1512년 폐지되고 영광 법성포창이 그 기능을 흡수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성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과 해운판관(海運判官) 1명이 소속되었다. 수운판관은 과거 수참전운판관의 후신으로 경기좌도와 경기우도에 각 1명씩 임명되었다. 해운판관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창 업무를 관장하였다. 수운판관은 종5품의 무록관(無祿官)이었으며, 해운판관 역시 수운판관과 동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운선을 운행할 때는 만호(萬戶)가 호송하도록 하였는데, 선박의 파손 없이 온전히 유지한 경우에는 만호와 그 휘하 인원을 표창하였다.

각 조창에서 세곡을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모두 수납하며, 담당 관리는 이 기일보다 먼저 조운선의 검열을 마치고 세곡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물길을 잘 아는 사람이 조운 선박의 운항을 지휘하도록 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조운 세곡의 종착지는 한성의 경창이었다. 한성의 경창으로는 호조(戶曹) 소속의 군자감(軍資監)과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 등을 들 수 있다. 조운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용산강(龍山江)과 서강(西江)에서 하역하여, 군자감과 광흥창, 풍저창 등의 창고로 옮겨 보관하였다. 용산강에는 한강 상류 방면에서 조운을 통해 운반되는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 내륙과 경기도 내륙 지역의 세곡이 운반되었고, 서강에는 한강 하류 방면을 통해서 들어오는 황해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해안과 경기도 해안 지역의 세곡이 운송되었다. 광흥창에 수납된 세곡은 정부 관료의 녹봉으로 지급되고, 풍저창에 수납된 세곡은 왕실의 지출 비용으로, 군자감에 수납된 세곡은 군량미로 배정되어 소비되었다.

조선 후기의 조운

조선 후기에는 조창을 통한 관선의 조운의 방식 대신 민간 선박에 의한 임운의 방식이 확대되었다. 또한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조운의 중요성과 비중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이르면 원주 흥원창과 춘천 소양강창, 강음 조읍포창 등은 조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배천 금곡포창 역시 1713년(숙종 39)에 조창의 기능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조선 후기에 신설되는 조창도 있었다. 1512년 폐지된 용안 득성창 인근에는 17세기에 함열 성당창이 신설되어 옥구 군산창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또한 18세기에는 1403년(태종 3)을 끝으로 조창이 폐쇄되었던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3개의 조창이 다시 신설되었다. 1760년(영조 36)에는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이, 1765년(영조 41)에는 밀양 삼랑창이 신설되었다. 마산창은 좌조창(左漕倉), 가산창은 우조창(右漕倉), 삼랑창은 후조창(後漕倉)이라고도 칭하였다. 경상도 3조창은 경상도 남부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운송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실린 전국 조창의 목록은 [표 5]의 내용과 같다.

[표5] 『만기요람』에 실린 전국의 조창

조창 혹은 수참(水站) 현 위치 수세(收稅)지역
충청도 충주 가흥창(可興倉)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충청도 충주 등 6개 고을
충청도 아산 공진창(공세곶창)[貢津倉(貢稅串倉)]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충청도 청주, 천안 등 7개 고을
전라도 옥구 군산창(群山倉) 전북 군산시 장미동 · 영화동 전라도 군산, 옥구 등 7개 고을
전라도 함열 성당창(聖堂倉) 전북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전라도 익산, 남원 등 8개 고을
전라도 영광 법성포창(法聖浦倉)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전라도 영광, 광주 등 12개 고을
경상도 창원 마산창(馬山倉)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경상도 창원 등 8개 고을
경상도 진주 가산창(駕山倉)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경상도 진주 등 8개 고을
경상도 밀양 삼랑창(三浪倉)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경상도 밀양, 김해 등 6개 고을

『만기요람』에 따르면, 19세기 초반에 운영되었던 조창은 모두 8곳이다. 그러나 1개 조창 당 수세 구역이 대부분 6~8개 고을에 지나지 않아, 조창의 기능이 과거보다 크게 쇠퇴하였다. 『대전회통』에는 각 조창별로 조운선과 조군(혹은 조졸)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아산 공진창에 조운선 15척 조군 720명, 함열 성당창에는 조운선 14척 조군 528명, 영광 법성창에는 29척과 1344명, 옥구 군산창은 23척과 816명 등이 배정되었다. 좌수운(左水運)인 충주 가흥창은 수참선(水站船) 15척이 배치되었다. 경상도의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에는 조운선 각 20척, 밀양 삼랑창에는 15척을 배치하였다. 이후 조운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어 19세기 전반 경에는 공진창은 조창 기능을 상실하고 삼랑창을 제외한 모든 조창의 조운선 숫자는 더욱 감소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조창의 세곡 수납과 조운선박 탑재 · 운반 등의 업무를 관장하던 수운판관이나 해운판관이 전임직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인근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의 겸임직으로 변경되었다. 해운판관의 경우, 1697년(숙종 23)부터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사(都事)가 해운판관을 겸임하다가 1762년(영조 38)에는 충청도 해운판관을, 1779년(정조 3)에는 전라도 해운판관을 각각 혁파하고, 아산현감과 군산포진첨사, 법성포진첨사가 각각 공세곶창(공진창)과 군산창, 법성포창에서의 업무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성당창에서는 함열현감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운판관의 경우, 우도수운판관은 금곡포창이 폐지되었던 1713년 혹은 그 이전에 이미 혁파되었다. 1779년(정조 3)에는 좌도수운판관도 혁파하고 충주 목사를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삼아 좌수참, 즉 가흥창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흥창에 세곡을 납부하는 충청도 6개 고을 중 충주를 제외한 나머지 5개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가흥창의 조세 수납과 운송의 일을 교대로 직접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신설된 경상도 3조창의 경우에도 별도의 판관이 임명되지 않았다. 가산창 세곡은 진주목사(晋州牧使)가 감봉(監捧)하고 적량첨사(赤梁僉使)가 영납(領納)하였는데, 감봉하는 사람을 도차원(都差員)이라 하고, 영납하는 사람을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이라 하였다. 마산창의 세곡은 창원부사(昌原府使)가 감봉(監捧)하고 구산첨사(龜山僉使)가 영납(領納)하였고, 삼랑창의 세곡은 밀양부사(密陽府使)가 감봉하고 제포만호(薺浦萬戶)가 영납(領納)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조운선박의 출항과 경창 상납(上納) 시기에 대한 규정이 보다 자세히 규정되었다. 충청도 · 황해도의 조운선은 매년 2월 20일 이전에 선박을 출항시켜 3월 10일 내에 상납하도록 하였고, 전라도의 조운선은 3월 15일 이전 선박 출항 4월 10일 이내에 상납하도록 하였다. 경상도는 3월 25일 이전 선박 출항, 5월 15일 이내 상납하도록 하였다. 출항과 상납 기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해당 관리 이하 사공(沙工) 및 격군(格軍)에 이르기까지 처벌을 내렸다. 전세(田稅)를 정월까지도 조창이 있는 포구로 수송하지 못한 경우에도 해당 고을의 수령(守令)이나 선박 정비 기한을 지키지 못한 인사들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시대별로 차이는 있으나, 삼남의 조운선은 1000석을 한도로 하여 세곡을 적재하였다. 선박의 출항 날짜를 미리 호조에 보고하도록 하여 부정의 가능성을 예방하였으며, 조운선에는 민간 소유의 곡식을 함께 싣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 조운의 비중이 점차 약화됨에 따라 조운선의 숫자도 감소 추세에 있었다. 조창에 소속된 조운선은 목재 운반선 등 다른 용도의 선박으로 변경되었다. 19세기 이후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은 더욱 감소하였다. 아산 공진창(貢津倉, 공세곶창)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혁폐되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운제도의 폐지와 함께 전국의 남은 조창 역시 그 기능이 완전히 소멸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조운제의 운영

세곡의 적재와 운송

-1. 조창에서의 세곡 수납과 선적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의 함열현 지도를 보면, 조선 후기 조창의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전라도 함열에는 성당창이 있었는데, 함열현 지도에는 성당창에 3채의 창고와 1채의 사창(社倉)이 표시되어 있다. 창고와 사창은 모두 세곡을 보관하던 건물이다. 그 외 성당창에 성당봉세청(聖堂捧稅廳)과 순풍당(順風堂), 사공청(沙工廳) 등 3채의 건물이 추가로 확인된다. 성당창의 집무소에 해당하는 성당봉세청은 세곡을 수납하고 적재하는 사무를 총괄하는 곳이었다. 순풍당은 조운선의 항해가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녕을 기원하는 당집이었으며, 사공청은 조운선을 운항하는 선원들의 항해 준비 장소이다. 다른 조창의 시설 배치도 성당창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성당창에는 창마당, 줄바탕 등의 지명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창마당은 창고에서 선박으로 세곡을 옮길 때에 임시로 세곡을 놓아두던 곳이었으며, 줄바탕은 선박에서 사용하기 위한 밧줄을 꼬던 장소였다고 한다. 그 외 선박의 입출입을 용이하게 하는 포구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조창에서의 세곡 수납과 조운선박의 세곡 적재 및 운송에 대해서는 조희백(趙熙百)의 『조행일록』(漕行日錄)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함열현감이던 조희백은 1875년 3월 15일 성당창에서 세곡을 싣고 한성의 광흥창에 운송을 담당하였다. 당시 성당창의 조운선단은 모두 12척이었는데, 그 중 조운 전용 관선은 6척뿐이고 나머지 6척은 주변 지역의 민간 선박을 조달하였다. 세곡을 실은 선박이 조창에 모두 모이면, 각 선박에는 문자로 된 일종의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어느 고을의 조세곡을 선적할 것인지에 대한 추첨을 진행하였다. 이를 분재법(分載法)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특정 고을의 수령이나 아전이 조운선의 선원과 결탁하여 부정을 저지를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 규정상 각 선박에는 선장 격인 사공(沙工) 1명, 격군(格軍) 15명 등 총 16명의 조졸(漕卒)이 기본 인원으로 탑승하였으며, 차사원(差使員), 각 고을의 감관(監官)과 아전 등도 동행하였으므로, 1척 당 평균 탑승 인원은 20명 가량 되었다. 당시 성당창 주변 8개 고을의 전세, 대동미, 포량미(砲粮米), 잡비 등 총 1만 6000여 석을 12척의 선박에 실었으므로, 1척 당 평균 1300여 석을 실었다. 1척 당 1000석 이상 싣지 못하도록 하였던 법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성당창에서 세곡을 각 조운 선박에 선적하는 작업은 10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선적 완료 후에는 순풍당에서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순풍제(順風祭)를 지내고 경창으로 출발하였다.

-2. 운하의 굴착 시도

서해안 태안반도 끝자락의 안흥량은 암초가 많아 선박이 좌초하거나 침몰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 남부로부터 경창으로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서는, 조운 선박들이 안흥량 일대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안흥량 일대에서의 사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하여, 고려 중앙 정부에서는 안흥량 동쪽으로 지나는 우회 수로를 굴착하려 하였다. 즉 남쪽의 천수만으로부터 태안반도를 가로질러 북쪽의 가로림만으로 나오는 운하를 뚫으려는 시도였다. 물길을 내야하는 거리는 약 7㎞ 가량 되었으며, 운하가 뚫리면 태안반도는 섬의 지형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운하 개착의 논의는 12세기 초반부터 제기되다가, 1134년(인종 12)에 정습명(鄭襲明)이 파견되어 본격적으로 운하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의 특성상 안정적으로 선박이 다닐 수 있는 물길을 만드는 공사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게다가 물길 공사가 진행되는 지점에는 단단한 암반층이 있었던 까닭에, 운하 굴착은 더욱 어려운 공사로 인식되었다. 결국 당시의 운하 공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태안반도에 운하를 뚫겠다는 시도는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매우 힘든 난공사였지만, 물길만 뚫리게 된다면 안흥량에서의 선박 사고를 완전히 없앨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려 말기인 1391년(공양왕 3)에도 태안반도에 운하 굴착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실패하였다. 조선왕조 개창 후인 1413년(태종 13)에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물길을 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계속된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끝내 운하로서 기능하지는 못했다. 한편 1669년(현종 10)에는 김좌명(金佐明)의 건의로 안흥의 남쪽과 북쪽에 창고를 각각 설치하고 통과하는 조운선은 모두 남창에 곡식을 하역하여 수레로 북창에 수송한다음, 빈 배로 안흥을 통과하게 해서 환난을 피하게 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노고와 비용이 컸던 까닭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강화도의 손돌목(孫石項) 역시 항해에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다. 고려 최씨 무신집권기의 최우(崔瑀), 조선 전기의 김안로(金安老) 등이 손돌목을 피하는 항로를 뚫기 위하여 김포의 굴포(掘浦)에 물길을 내어 서해와 한강을 잇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조운 종사 인원과 선박

조선시대 조졸은 다른 신역(身役)이 부과되지 않고 세습직으로 유지되는 직역이었다. 하지만 업무가 고되고 회피하고자 했던 신역이었던 까닭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계층으로 간주되었다. 신역을 피해 도산하거나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아,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추쇄(推刷)하였으며, 부족한 인원은 물길에 익숙한 사람으로 충원하기도 하였다. 조졸 중에는 선박마다 영선(領船) 1명이 있고 10척마다 통령(統領) 1명이 있었으며 30척마다 천호(千戶) 1명이 배정되었다. 수부(水夫)의 경우, 경기좌도에 306명, 경기우도에 292명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두 번으로 나누어 교대하도록 하였다. 부주의로 인한 조운선박의 파손이 있을 경우에는 수운판관과 해운판관을 중죄에 처하고, 조졸과 수부에게도 무명을 징수하였다. 일부러 배를 파손하고 곡식을 훔친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모두 변상하도록 하였으며, 그러한 의심이 들 경우에는 3분의 2를 변상하도록 하였다. 명백히 사고로 선박이 파손된 경우에는 변상시키지 않으며, 조운하는 세곡을 훔친 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경우에는 절도 와주(窩主)의 죄로서 처벌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조졸을 두 번으로 나누어 교대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인원당 포(布) 2필의 신포(身布)를 징수하였다. 그 인원 중에서 사공과 격군을 선발하였는데, 선박당 사공 1명과 격군 15명을 배정하여 이들에게는 신포를 면제하고 급료를 지급하였다. 또한 조졸에게는 인원당 복호(復戶) 2결을 지급하여 공물과 잡역을 면제해주는 대신, 결당 쌀 15두를 징수하여, 사공ㆍ격군의 급료 및 조운선 운행의 각종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조졸의 인원이 규정수보다 많이 부족한 고을의 수령은 파직시키도록 하며, 해당 업무에 소홀했던 아전도 처벌하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좌수운(左水運)인 충주 가흥창 수참선(水站船)에는 사공 1명과 격군 3명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각 인원마다 봉족(奉足) 수부 2명을 배치하여 신역조(身役租) 3석(石)을 징수하였다.

조선 후기 조운선단에는 각 고을의 감관(監官)이나 아전들도 함께 승선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위반하였을 때에는 처벌이 행하여졌다. 조운선의 운행 시에는 30척으로 하나의 선단을 구성하여 함께 출발하여 이동하도록 하였다. 삼남의 조운선단은 충청도 원산도(元山島)와 안흥진(安興鎭)에서 운송 세곡에 대한 점검을 받도록 하였으며, 한강으로 들어오기 직전인 강화(江華)의 연미정(燕尾亭)과 봉상포(鳳翔浦)에서도 운송 세곡을 다시 점검하였다. 경창에 도착하면 호조의 관원들이 친히 점검하여 수납하였다. 조운선이 침몰할 경우에는 해당 지역을 관장하는 지방관 혹은 변장(邊將)을 파면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각 조창에 소속되어 있는 조운선박의 경우, 강을 오르내리는 수참선의 경우, 건조 7년 후에 크게 수리하고, 14년이 지나면 새로 건조하였다. 연안 해로를 항해하는 조운선은 건조 10년 후에 크게 수리하고, 20년이 지나면 새로 건조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유통경제의 발전과 함께 민간선박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운 항해 시에 민간선박을 활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민간선박의 활용은 조졸의 인원 부족이나 조운선의 정기적 건조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민간선박 외에 지토선(地土船)이나 주교선(舟橋船), 훈국선(訓局船) 등도 조운활동에 적극 활용되었다. 지토선은 조창에 소속되지 않은 각 고을 소유의 선박으로, 조선 후기 조창을 거치지 않고 경창으로 직접 세곡을 납부하는 고을에서 지토선을 임대하여 이용하는 것이 우선시되었다. 지토선 이용이 여의치 않은 경우, 주교사(舟橋司) 소속의 주교선, 훈련도감 소속의 훈국선, 민간상인 소유의 선박 등이 조운에 활용되었다.

이들 선박이 조운에 동원될 때는 모두 배삯[船價]이 지급되었으며, 조졸 이외의 인원이 조운 선박을 운행하는 경우, 도난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원을 확실히 조사하였다. 조운선이 침몰되었을 때에는, 침몰 지역 관할 지방관은 곧바로 현장을 방문하여 침수곡(浸水穀)을 건져내도록 하여 손실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고의로 선박을 침몰시켰을 때에는 탑승 선원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렸으며, 미곡이 운송 중 부족하게 된 경우에는 해당 선박의 감관(監官) 이하 선원들에게 부족분을 추징하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근대시기 조운으로 운송되는 세곡은 국가 재정의 중추가 되었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 납부한 세곡을 중앙의 경창까지 신속하고 손실없이 운반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었다. 특히 산지가 많아 육로 운송에 어려움이 많은 한반도의 상황에서, 조운의 비중과 중요성은 매우 높았다. 그런 까닭에 고려와 조선에서는 10곳 내외의 조창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는 방식을 제도적으로 구축하였다. 하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로서는 적지 않은 비용과 노력을 투여해야 했다. 세곡을 운반할 전용 조운선을 마련해야 했고, 조운선박을 운행하는 전문 인력인 조졸도 신역 부과의 형태로 충분히 확보해야 했으며, 세곡을 수납하는 조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해야 했다. 전국의 세곡을 10곳 내외의 조창으로 수납하여 중앙정부로 운송하는 조운의 형식은 고도로 집중화된 중앙집권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방식은 중앙정부의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통제가 유지되어야만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는 조창으로 수납되는 세곡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게 되고, 각 고을에서 직접 경창으로 세곡을 운송하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그에 따라 조창에 등록된 국가 선박 대신, 지방 고을 소속의 지토선이나 민간 선박 등이 조운에 활용되었으며, 신역의 형태로 조졸을 조운 업무에 종사하게 할 필요성도 감소하였다.

한편 유통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화폐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조세의 금납화 현상 역시 조창의 역할과 조운의 중요성을 점차 축소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조창을 통한 조운의 역할과 비중이 크게 감소하였고, 결국 19세기 말에 이르면 조운제도가 소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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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전기 조창(漕倉)의 분포와 입지」(정요근,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집필자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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