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도 ()

동계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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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훈련원주부, 보성군수, 경주영장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대이(大而), 경달(景達)
동계(東溪), 청계도사(淸溪道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7년(명종 22)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함안(咸安)
주요 관직
보성군수|경주영장
정의
조선시대 훈련원주부, 보성군수, 경주영장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자는 대이(大而)·경달(景達)이다. 호는 동계(東溪)이다. 자칭 청계도사(淸溪道士)라 일컬었다. 생육신 조여(趙旅)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조지(趙址)이다. 큰아버지 조우(趙堣)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부윤 오운(吳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3년(선조 16)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했다. 1587년정구(鄭逑)를 사사한 뒤 3년 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이러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과를 지원해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임명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청하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경산현령이 되었다. 1606년 고성현령에 임명되었다. 1608년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직인 소모장(召募將)으로 창원에 차송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본영중군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진주옥에 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첨지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4년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싫어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7년 순찰사 윤훤(尹暄)이 수군 분담을 개청하는 일로 불러 중군에 들었다. 이 때 토포사를 겸행하여 영천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이경기(李景祺) 일당을 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1622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청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순변사 유비(柳斐)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호위장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 때 군사를 모아 궐문을 지켰다. 이 공으로 보성군수가 되어 학문을 진작시켰다. 또한 미납되어 온 4,000여 석의 세미(稅米)에 대해 감사에게 진정해 2,800석을 감면받아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본도중군을 겸하고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했다. 1625년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으로 차송되었다.

1627년 청나라의 침략 낌새가 보이자 본도호소사(本道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 되었다가 별장이 되었다. 영장제가 설치되자 진주영장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했다. 다시 상주영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괴산군수에 임명되어 소를 올려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부임하였다. 1629년 경주영장이 되어 3년 간 재직했다.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또한 순조 때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도 기록되었다. 청송의 덕봉사(德峯祠)에 배향되었다.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저서로 『동계집』 3책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동계집(東溪集)』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한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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