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고학에서 철기시대란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서기전 300년경부터 삼국이 정립된 서기 300년경까지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은 이 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어 서기전 300년에서 서기 전후(혹은 서기전 100년)까지를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로, 서기 전후(혹은 서기전 10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구분하고 있다. 반면 일부 연구자는 이를 통합해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지칭하기도 한다.
고고학에서의 시대구분은 19세기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톰센(Thomsen, C. J.)에 의해서 처음 이루어졌다. 그는 1836년에 간행된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내책자에서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에 따라 돌, 청동, 철의 순서로 계승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 후, 그의 제자인 월사에(Worsaae)가 층서적인 발굴을 통해 이를 보완하면서 선사시대를 석기시대(Stone Age) · 청동기시대(Bronze Age) · 철기시대(Iron Age) 등으로 나누는 삼시대법(三時代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삼시대법은 곧 바로 전 세계 고고학계로 파급되었다.
철은 청동기를 잇는 새로운 금속기로 인류가 도시나 국가를 형성한 문명단계에 들어서면서 등장하였다. 청동에 비해 철의 원료는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서 야철기술(冶鐵技術)만 습득하면 생산이 가능하였다. 인류가 철을 최초로 이용한 예는 서기전 4,000년대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철제구슬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철의 제작은 서아시아의 아나토리아(Anatoria) 지방에서 출현한 히타이트(Hittite)제국(서기전 1450∼1200)에서 시작되었다. 히타이트제국이 멸망한 뒤 철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졌다. 대체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서기전 13세기, 이집트는 서기전 12세기, 이란은 서기전 10세기, 유럽은 이보다 약간 늦은 서기전 9∼8세기경에서야 철이 보급되었다.
한편, 서기전 8세기경에는 북방 흑해연안에도 야철기술이 전파되어 이 지방 주민들의 기마유목화(騎馬遊牧化)를 촉진시켜 스키타이(Scythai)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스키타이 유목족에 전파된 철기문화는 동방으로 퍼져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파급되었다. 중국에서 인공철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등장한다. 전국시대 후반에 들어서면 철기의 보급이 현저하게 진전되었으나 출토유물들은 농공구(農工具)가 주류를 이루었다. 전국시대 말에서 전한(前漢) 초에 걸쳐서 철의 생산이 급진전되지만 여전히 주조(鑄造)로 된 농공구가 주이고, 무기는 청동제를 사용하였다. 전한 말에서 후한(後漢)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강(鋼)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철제 큰칼〔大刀〕와 같은 무기가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으나 대체로 크게 두 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첫째 단계는 중국제 철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서기전 4∼3세기에 해당하는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서북지방에 걸쳐서 철기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즉 평안남도 덕천군 청송리에서는 명도전이 철제이기(鐵製利器)와 함께 출토되었고,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에서는 연(燕)나라 제품이 분명한 철제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명도전은 중국연나라의 동으로 만들어진 화폐로서 표면에 ‘명(明)’자가 양주(陽鑄)되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유입된 철기류는 중부지역을 거쳐 서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는데 충청남도 부여 합송리유적, 당진 소소리유적과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신동리유적, 완주 갈동 · 신풍유적, 장수 남양리유적 등지에서 주조철기가 청동기류와 함께 다수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철기는 주조로 된 농기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표지로 한 청동제 무기와 덧띠토기〔粘土帶土器〕등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 전후에 한반도로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단계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낙랑군(樂浪郡)의 설치는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철기는 우리나라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즉 도끼 · 가래 · 낫 등 철제 농경구와 단검 · 창 · 꺽창을 비롯한 무기류가 전국적으로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 · 남부지역 철기문화는 최소한 두 가지 통로로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의 통로는 육로를 이용한 것으로 대동강유역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되었다. 낙동강유역의 움무덤〔土壙墓〕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 전한대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 가상부귀경(家常富貴鏡) 등 거울이 발견되고 있으며 특징적인 토기는 와질토기(瓦質土器)이다. 다른 하나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이 지역의 조개더미에서 화천(貨泉), 오수전(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점뼈〔卜骨〕가 발견되었고, 특징적인 토기로는 경질민무늬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 등이 있다. 다만 두 계열의 문화는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혼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철을 채취하던 제철유적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철 생산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을 보면 서기 3세기경 영남 일대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대방(帶方), 왜(倭)와 철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단 서기 3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철기생산의 전국적인 확산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이 지역에서 밀려난 위만조선 유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한편 해로를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북부 · 중부 · 남부지역 등 각 지역별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먼저 북부지역에서 가장 이른 철기시대 유적은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유적, 영변 세죽리유적 등이다. 용연동유적에서는 연나라 제품이 분명한 쇠도끼〔鐵斧〕 · 쇠화살촉(鐵鏃) · 쇠꺾창〔鐵戈〕등과 함께 쇠낫〔鐵鎌〕 · 반달쇠칼〔半月形鐵刀〕 · 쇠가래〔鐵鍬〕 · 쇠호미〔鐵鋤〕등의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다. 또 세죽리유적의 철기시대 층에서 확인된 집자리는 모두 지상가옥이다. 집자리에서 명도전, 포전(布錢) 등의 화폐와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및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세죽리유적이 존재했던 시기의 무덤으로는 움무덤, 조개더미, 독무덤〔甕棺墓〕등이 주를 이루며, 유물로는 철기, 청동기와 더불어 회색의 삿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철기로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쇠칼, 도끼, 자귀 등이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문화유형을 소위 “세죽리-연화보유형”이라 명명하고 있다. 한편 동북부지역인 함경북도 회령 오동유적에서는 제6호 집터에서 주조 쇠도끼가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무산 호곡동유적에서 5기와 6기에 속하는 집터가 철기시대에 속하며 다수의 철기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5기에 속하는 집터에서 출토된 주조 쇠도끼는 연나라의 철기와 관련된다고 보고 있다.
대동강유역에서 철기시대의 무덤은 널무덤〔土壙木棺墓〕, 덧널무덤〔土壙木槨墓〕, 귀틀무덤〔木室墳〕으로 구분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널무덤의 연대를 서기전 5세기에서 2세기 중엽으로, 덧널무덤을 서기전 2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강서 태성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동투겁창〔銅矛〕등의 청동기류, 쇠도끼, 철단검 등의 철기류, 화분토기〔花盆形土器〕, 배부른 단지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으로는 서흥 천곡리 돌널무덤〔石棺墓〕, 황해도 송산 솔뫼골 돌돌림무덤〔圍石墓〕, 함흥시 이화동 움무덤 등이 있다. 따라서 대동강유역의 철기문화는 세형동검이 만들어지고, 움무덤이 유입된 서기전 3∼2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또 서기전 1세기 이후에는 귀틀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낙랑군 계통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집터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이곡리유적과 춘천 중도유적을 들 수 있고, 이후 조사된 것으로는 하남 미사동유적, 수원 서둔동유적, 횡성 둔내유적, 양양 가평리유적, 명주 안인리유적, 중원 지동 · 하천리유적 등이 있다. 이 유적들에서는 중부지역 특징적인 여(呂)자형 집터와 철(凸)자형 집터가 발견되었고, 유물로는 경질민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 회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다수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화성 기안리유적에서는 대규모 철기 생산시설이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단야로(鍛冶爐)와 더불어 숯가마, 송풍관, 송풍구, 쇠찌꺼기〔鐵滓〕,쇠조각〔鐵片〕등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중부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낙랑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 알 수 있다.
중부지역 철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는 움무덤, 독무덤, 돌무지무덤〔積石墓〕등이 있다. 움무덤은 가락동유적의 제1호 무덤에서 처음 알려졌다. 그리고 천안 청당동유적에서는 다수의 도랑〔周溝〕이 있는 움무덤, 즉 도랑움무덤〔周溝土壙墓〕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연질짧은목항아리〔軟質短頸壺〕와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청동제 말모양띠고리〔馬形帶鉤〕11점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도랑움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독무덤은 가락동 제2호분과 같이 움무덤과 합장(合葬)으로 발견되거나, 단독묘일 경우에도 돌무지무덤과 같은 다른 묘제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돌무지무덤은 양평 문호리유적, 춘천 중도유적, 제원 양평리 · 도화리유적 등 한강 상 · 중류에서 서기 2∼3세기경에 해당되는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4세기 이후에는 백제식 토기의 등장과 함께 기단식 돌무지무덤 등의 고분이 등장하였다.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Ⅰ기는 세형동검이 사용되면서 일부 주조철기류가 나타나는 단계로 서기전 3∼2세기경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과 완주지역에서 다수의 널무덤들이 확인되었다.
Ⅱ기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로 서기전 1세기 초반에서 서기 2세기 전반까지로 비정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광주 신창동유적,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사천 늑도 조개더미, 김해 봉황대 조개더미 등이 있고, 창원 다호리유적, 경주 조양동유적 등지에서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집터의 형태는 서남부지역에서 네모모양, 동남부지역에서 원형 혹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출토된 철기로는 쇠낫, 쇠도끼 등 농공구와 쇠창 · 쇠화살촉 · 철검 등의 무기류가 있다. 조개더미에서 주로 보이는 경질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지만 경도가 높아지고 기형이 다양한 토기를 말한다. 또 동남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와질토기는 소성도(燒成度)가 낮아서 흡수성이 있고 기와와 비슷한 회백색 혹은 회색을 띠는 연질의 토기인데, 물레로 빚었기 때문에 토기의 벽이 얇고 표면이 고르며 기종도 다양하다.
Ⅲ기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는 단계로 서기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후반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집터는 대부분 네모모양 혹은 타원형 구덩식〔竪穴式〕집터이다. 무덤은 서남부지역에서 다수의 도랑움무덤이 확인되었고, 동남부지역에서 김해 양동리유적, 울산 하대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덧널무덤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덧널무덤에서는 장검,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쇠화살촉 등 철제무기류의 부장이 증가하였다. 또 서남부지역에서는 연질의 두드림무늬토기가 등장하고, 동남부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지속된다. 두드림무늬토기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워낸 민무늬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는 물레로 성형해 등요(登窯)에서 구워낸 것인데, 기벽을 강화하기 위해 박자(拍子)로 기벽을 때린 두드림무늬가 있는 토기를 말한다.
서기 3세기 말 이후에는 서남부지역인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대형 독무덤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등장한다. 한편 동남부지역의 경주와 김해를 중심으로 고식도질토기, 북방계 말갖춤〔馬具〕과 무기류가 출현한다. 이와 더불어 입지의 우월성, 독립부장곽(獨立副葬槨)의 존재, 무기의 개인집중화, 순장(殉葬)의 조건을 갖춘 고분, 즉 덧널무덤에 이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등이 출현하게 된다.
철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최근 유적 발굴조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하여 많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철기시대 초기(초기철기시대)의 양상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고,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의 양상도 드러나고 있다. 철기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북부지역에서는 후기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뒤이어 부여, 고구려, 낙랑, 옥저(沃沮), 예(濊) 등이 등장하였던 시기이고, 중 · 남부지역에서는 삼한에 이어 백제, 신라 및 가야 등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유입되었고,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파되었지만,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와 융합되어 새롭게 생성, 발전되어 나갔던 역사적 특수성이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시대구분 용어에 대한 논란이 많다. 우선 철기시대의 문제점으로는 역사성의 부재를 들고 있다. 반면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경우, 초기철기시대(서기전 300∼100년)를 하나의 시대로 설정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고, 원삼국시대도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삼한시대의 경우, 역시 한반도 남부지역에 한정되는 용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하여 앞으로 이 시기의 시대구분 용어를 통합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