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무산 호곡동’이라고도 한다. 두만강 상류의 계곡과 성천(城川)이 합류하는 주변에는 선사 유적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호곡동 유적은 이들 선사유적의 중심부인 무산읍 서쪽에 있다.
이 유적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 5차에 걸쳐 조사되어 약 40개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층위는 두터운 퇴적층이 여러 시기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일부는 교란되어 있었다.
주거지들은 그 형태와 출토유물에 의해 크게 6기로 나누고 있다.
제1기에 해당되는 제9호 주거지는 한 변의 길이가 약 380㎝인 정방형을 이루며 움의 깊이는 108㎝이다. 기둥구멍은 15개로 동서, 남북방향으로 각각 4줄로 뚫려 있다. 화덕은 중심에 있고, 바닥을 10㎝ 정도 오목하게 판 뒤 주위에 15∼25㎝ 크기의 강돌 8개를 돌려 놓았다.
출토유물은 번개무늬 등의 유문토기(有文土器)와 무문토기·돌도끼〔石斧〕·방추차(紡錘車)·연석(碾石)·가래 및 흑요석기(黑曜石器) 등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주거지가 방형 또는 장방형이고, 유물로 유문토기가 출토되는 점이다.
제2기에 해당되는 제20호 주거지는 남북 470㎝, 동서 420㎝의 장방형으로 움의 깊이는 140㎝ 내외이다. 화덕은 동쪽으로 치우친 북편 가까이에 있고, 기둥구멍은 잘 남아 있지 않다.
바닥에서 발견된 유물은 무문토기편·홍도편(紅陶片) 등과 흑요석기편·돌도끼·연석·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및 골기(骨器)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특색은 주거지가 장방형이고, 유물로 홍도가 나타나는 점이다.
제3기 유적인 제31호 주거지는 크기가 동서 540㎝, 남북 460㎝이고, 움의 깊이가 약 70㎝이다. 바닥에는 3줄로 주춧돌이 놓여 있고, 바닥의 동쪽에 반월형으로 출입구가 있으며, 지름 60∼70㎝, 높이 25㎝의 화덕이 있다.
유물로는 갈색마연토기·돌화살촉·송곳·반월형석도·방추차·흑요석기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주거지는 장방형이 대부분이고 주춧돌이 나타나며, 갈색마연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제4기 유적인 제9호 주거지는 움의 깊이가 100㎝ 내외이고, 크기가 남북 1,150㎝, 동서 620㎝이다. 움의 동·서벽면에 7개의 초석(礎石)이 서로 대칭되게 놓여 있어, 3줄의 주열(柱列)을 이루고 있다.
화덕은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고 바닥을 좀 파낸 형태이다. 북벽에는 출입구로 생각되는 높이 20㎝, 너비 10㎝의 계단형의 대(臺)가 있다. 출토유물은 흑도(黑陶) 외 돌화살촉·돌도끼·석창(石槍)·반월형석도 등이다. 이 시기의 특색은 주거지에 주춧돌이 사용되고, 유물로 흑도와 마제석기가 출토된다는 점이다.
제5기 유적인 제5호 주거지는 동남쪽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남북 560㎝, 동서 480㎝의 크기이며, 바닥 중심부에 화덕이 있고, 주거지 서쪽에 5개, 남쪽에 4개의 주춧돌이 있다.
유물로는 흑도·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마제석기·숫돌·송곳·철기편(鐵器片)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제4기와 같이 흑도가 나타나고, 새로이 철기편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제6기의 주거지인 제17호의 경우 남북이 1,270㎝, 동서가 770㎝로, 바닥은 진흙으로 잘 다져졌다. 주춧돌은 남북으로 걸쳐 4개씩 2줄로 놓여 있다. 바닥에는 굵은 기둥이 타서 넘어진 길다란 숯덩이가 있고, 중심에 큰 화덕이 있으며 주변에 6개의 작은 화덕이 있다.
유물은 토기로 흑도·우각형파수부토기(牛角形把手付土器)·고배(高杯)·시루가 있고, 철기로 철부(鐵斧)·철겸(鐵鎌) 등과 청동팔찌와 청동반지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특색은 우각형파수부토기의 출현과 철기의 본격적인 사용이다.
이상 주거지들의 편년을 보면, 제1기는 신석기시대 후기, 제2∼4기가 청동기시대, 제5·6기는 철기시대로 보고 있다. 이 유적은 다소 교란되었으나 약 40개의 주거지가 발굴된 집단주거지로 한반도 동북지역의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