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석은 기둥으로부터 전달되는 건물의 무게를 지반에 전달하는 부재이다. 평안남도 궁산리 제4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조약돌이 초석의 시원적 형태이다. 삼국시대·통일신라 시대의 초석은 대부분 원형초석이나 방형초석이다. 원주형초석이나 방주형초석은 정자·누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초석은 돌로 되어 있어 그 위에 건립된 건축이 재해로 없어졌다 하더라도 초석은 남는다. 이 초석의 배열 상태, 초석 간의 거리 등을 통해 당시의 건물 모양을 추정할 수 있다. 초석은 구조역학적인 요소이지만 없어진 건물을 추정·복원하는 데 기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건축은 목조건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초석의 발생은 수혈주거(竪穴住居)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즉, 평안남도 용강 궁산리(弓山里) 제4호 주거지에서는 지름 20㎝ 되는 기둥구멍 속에 조약돌 2, 3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이 초석의 시원적인 형태라 생각된다. 초석의 실증적인 자료들은 삼국시대의 각종 건물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초석이 하나의 기둥꼴에 놓이는 독립기초인 것이 특징이다.
초석은 돌의 가공 여부에 따라 막돌초석과 다듬돌초석으로 크게 나뉜다. 막돌초석은 자연상태의 돌을 적당한 크기로 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덤벙주초’라고도 한다. 이 막돌초석은 그 상면이 울퉁불퉁하나 이를 다듬지 않고 그 위에 놓이는 기둥 밑면을 울퉁불퉁한 초석면에 맞추도록 하는데 이 작업을 ‘그랭이질’이라 부르고, 때로 ‘그레질’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많은 건축물은 대부분이 그레질한 막돌초석을 쓰고 있음을, 하동 쌍계사(雙磎寺) 누문 초석이나, 내소사(來蘇寺) 대웅전 초석에서 알 수 있다.
다듬돌초석은 기둥이 놓이는 자리인 주좌(柱座)의 가공형태에 따라 원형초석 · 방형초석 · 팔각형초석으로 나뉘고, 초석의 높이가 높은 원주형초석(圓柱形礎石) · 방주형초석(方柱形礎石)으로 나뉜다.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의 초석은 대부분 원형초석이나 방형초석인데 특히 주좌의 둘레를 그 위에 서게 되는 기둥의 모양에 따라, 원형과 방형, 또는 팔각형으로 다듬는다. 고구려시대의 초석 중 통구(通溝)에서 발견된 초석은 팔각형 초석이다. 또, 나주향교(羅州鄕校) 대성전의 초석은 연꽃을 새김한 원형초석으로 특수한 것이다. 원주형초석이나 방주형초석은 정자 · 누 등에 많이 사용된다. 정읍 피향정에서는 원주형초석을,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방주형초석을 볼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초석이라기보다 돌기둥[石柱]으로 사용되었다고 함이 타당하다.
초석은 돌로 된 만큼, 그 위에 건립된 목조건축이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졌다 하더라도 초석만은 그 자리에 남게 된다. 따라서 초석의 배열상태, 초석간의 거리 등으로 당시의 건물모양을 추정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의 황룡사지(皇龍寺址) 목조탑지(木造塔址)에서는 정면 8줄, 측면 8줄로 초석이 놓여 있어, 당시의 황룡사 9층목탑이 정면 7칸, 측면 7칸이 되는 정방형평면의 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석 사이의 거리를 현재의 척(尺)으로 측정하고, 이들이 정수로 되는 수치를 찾으면, 당시의 사용척도가 현재의 척도와 얼마의 차이를 가지며 이것은 곧 동위척(東魏尺)이냐, 당척(唐尺)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초석을 기단 위에 놓을 때에는 그 놓는 자리에 적심(積心)을 만들고, 적심 위에 초석을 놓음으로써 보다 안정되게 한다. 적심은 지반에 작은 막돌을 깔고 다져 만든다. 따라서, 설사 초석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하더라도, 적심의 중심위치를 찾아 다른 초석들, 또는 적심들과의 관계에서 본래 건물모습을 추정할 수도 있다.
초석은 이처럼 본래의 목적이 구조역학적인 요소이지만, 없어진 건물을 추정 복원하는 데 기반이 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건물의 세부적인 의장요소(意匠要素)로서 중요한 면을 가진다. 예컨대, 범어사(梵魚寺) 일주문의 초석은 원주형초석으로 이 일주문이 다른 사찰의 일주문과 다른 특이한 외관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의장적 요소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