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은 일제강점기, 감리교회 목사이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의 1세대 지도자이다. 주로 종로 기독교 청년회와 여러 감리교회에서 설교하였으며, 『동아일보』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학술지인 『신학세계』에 글을 기고하였다. 1937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단을 옮겨 돈암정 교회를 개척하는 등 그리스도의 교회 1세대 목회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최상현(崔相鉉)의 호는 청송(靑松)이다. 1891년,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고, 진남포(鎭南浦)의 삼숭학교(三崇學校)를 거쳐 1912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동대문교회(東大門敎會) 전도사로 부임하여 1년간 시무하면서 연희 전문학교 조교수와 동창회장직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영역(英譯)하는 일에 관여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얼마간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중국으로 잠시 망명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종교 서적을 탐독하며 지냈으며, 1921년 3월, 『동아일보』에 「인물평정(人物評定)의 표준론(標準論)」을 연재하면서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감리교(監理敎) 협성신학교에서 펴내는 『신학세계(神學世界)』의 편집을 맡으면서, 신앙 및 역사 교양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세계 위인들의 생애와 사상 연구에 심취하여 이 방면에만 10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전영택(田榮澤) · 임영빈(林英彬) · 방인근(方仁根) · 이은상(李殷相) 등과 함께 기독교 문학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사이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按手)를 받았다. 궁정 교회 · 체부동 교회를 거쳐 1935년, 목회(牧會)를 사임하고 성서공회 관계 일을 보던 중 1936년,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 체이스(J T Chase)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겼다.
8·15광복 후, 미군정청(美軍政廳)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은 일이 있다. 1947년, 돈암동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50년 8월, 공산군에 의해 납치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에 행방불명이라고 하였는데, 항목 속성의 '사망연도'에 1950년이라고 해도 되나요?/
1981년, 그를 기념하는 최상현 목사 기념관이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내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