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영송리 선사유적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집터, 중도식 민무늬토기, 타날문토기 등이 출토된 원삼국시대 마을유적.
이칭
약칭
영송리유적, 포천영송리유적
유적
건립 시기
원삼국시대
소재지
경기도 포천시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기도
종목
시도기념물(1994년 7월 2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158-2번지 외 30필지
내용 요약

포천영송리선사유적(抱川永松里先史遺蹟)은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집터, 중도식 민무늬토기, 타날문토기 등이 출토된 원삼국시대 마을유적이다. 1994년 한양대학교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원삼국시대 철자(凸字) 모양 집터 5동과 토기 무더기 1개소를 확인하였다. 1994년 7월 2일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정의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집터, 중도식 민무늬토기, 타날문토기 등이 출토된 원삼국시대 마을유적.
발굴경위 및 결과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일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 마을유적으로, 1994년 7월 2일 경기도기념물(158-2번지 외 30필지)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향토사학자인 이우형이 처음 발견하였다.

발굴 조사는 영평천 일대의 자갈과 모래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유적의 일부가 훼손된 것을 국민대학교박물관 장명수가 언론에 제보함에 따라 포천군의 긴급 의뢰로 1994년 7월 16일부터 같은 해 9월 14일까지 한양대학교박물관이 실시하였다.

조사는 동쪽으로부터 A, B, C구역으로 나누어 A, B구역은 전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C구역은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 지역은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269번지, 270-2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유물이 채집되고 유적 훼손이 신고된 곳은 A구역에 해당하며, 조사 결과 원삼국시대 집터 2동, 토기 무더기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B구역은 원래 지형이 잘 남아 있는 곳이지만, 향후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조사 결과 원삼국시대 집터 3동이 발견되었다. A구역과 B구역의 하층은 자연 퇴적층이 발견되고 있어 더 이상의 문화층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와 특징

A-1호 집터는 (타)원형으로 3m×2.2m, A-2호 집터는 철자(凸字) 모양으로 동쪽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B-3호 집터는 5.8m×4.2m의 철자 모양으로 추정되고, B-4호 집터는 5.5m×4.8m의 철자 모양으로 추정되나 출입구 부분이 파괴되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B-5호 집터는 8m×6m의 철자 모양으로 가장 크다.

한편 토기 무더기는 총 3개의 토기가 원형을 그리며 둘러 있었는데, 2개는 똑바로 서 있었고 1개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토기들은 모두 아가리 부분을 주1과 토기 파편으로 덮은 상태였다. 이러한 형태는 저장 구덩이에서 많이 발견되는 형태로 집 외부에 시설한 별도의 저장 공간으로 추정된다.

집터의 내부 시설은 주2주3들이 확인되었다. 화덕자리는 집터의 뒷벽 쪽으로 치우친 중앙에서 발견되었는데, 뒷벽 쪽에 불막음돌을 세워 둔 중도식 화덕자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A-1호 집터에서는 북서쪽 모퉁이의 솥받침 위에 중도식 주4 바리가 올려진 부뚜막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위치와 구조로 볼 때 외줄구들(한 줄 고래를 갖춘 난방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토 유물은 다수의 중도식 민무늬토기와 소수의 주5가 확인되었고, 가락바퀴, 갈돌 등도 출토되었다. 특히,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목있는독과 손잡이달린독이 확인되고 아가리가 짧게 밖으로 구부러진 항아리들이 많다. 타날문토기는 A-5호에서 몸통편 1점만이 출토되었는데, 표면에 평행선문을 타날한 것이다. 철기류는 집터에서 출토되지 않았다. 다만 조사 과정에서 쇠창, 손칼, 쇠낫 등이 출토되었다.

의의 및 평가

포천영송리선사유적은 보존을 목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대표적인 유적이다. 그리고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 여 · 철자 모양 집터가 존재했음을 확인해 준 유적이다.

포천영송리선사유적의 연대는 집터의 형태와 출토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집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중도식 민무늬토기이다. 특히 중도식 민무늬토기 기형 가운데 목있는독, 손잡이달린독, 아가리가 짧게 밖으로 구부러진 형식의 토기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2세기 대를 중심으로 하는 유적이다.

그런데 토기 무더기에서 발견된 중도식 민무늬토기와 타날문토기는 집터에서 출토된 유물들보다 늦은 형식의 토기들이고, 제토 과정에서 발견된 쇠창 역시 늦은 형식이다. 따라서 3세기 대까지도 마을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수의 주6 조각이 발견되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성백제 고고자료집』 상(기전문화재연구원, 2005)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영송리 선사유적 발굴조사 보고서』(한양대학교 박물관, 1995)

논문

김영승, 「임진강유역 중도식주거문화권 취락 연구」(숭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이요한, 「원삼국시대 임진 · 한탄강유역 지역성 연구 -취사 · 난방시설을 중심으로-」(상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박경신, 「전환기 중부지방 원삼국시대 취락의 편년과 전개 양상」(『국가형성기 한성백제의 고고학적 검토』, 한국상고사학회, 2011)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주석
주1

오랜 시간 냇바닥이나 냇가에서 물에 씻기기도 하고 다듬어지기도 한 돌.    우리말샘

주2

선사 시대의 집터에서 난방과 음식 마련을 위하여 불을 피우던 자리. 가장자리의 바닥에 흙 또는 돌을 두르거나 깔았다.    우리말샘

주3

움집터의 바닥 같은 데에 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파 놓은 구멍.    우리말샘

주4

청동기 시대에 사용한 무늬 없는 토기. 지역에 따라 팽이형 토기, 미송리식 토기, 화분형 토기 따위가 있으며 빛깔은 붉은 갈색이다.    우리말샘

주5

토기의 몸통을 다지거나 부풀리기 위해 두들개로 두드려서 삿무늬나 문살무늬가 생긴 토기.    우리말샘

주6

표면에 빗살 같은 줄이 새겨지거나 그어져 있는 신석기 시대의 토기. 붉은 찰흙을 이용하여 표면에 빗살 같은 평행선이나 물결 모양을 이룬 점선 따위의 기하학적 무늬를 넣어 얄팍하게 만들었다. 핀란드, 러시아, 몽골, 한국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박경신(한국기독교박물관 학예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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