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근산성이 자리한 원평리에는 이전에 사근역원(沙斤驛院)이 있었기에 사근산성이라고 불린다. 산성은 해발 443m 연화산(蓮花山)의 능선을 돌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연화산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3번국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으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방면과 전북특별자치도 장수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방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입지하였을 뿐 아니라, 동 · 남 · 서쪽의 세 방향이 남강(南江)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연의 요새로, 남해를 통해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산성은 1380년(우왕 6)에 영남지방을 휩쓴 왜구들에게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과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혈전 끝에 함락된 뒤 조선 성종 때 보완하여 쌓았다고 한다. 그 뒤 왜구는 함양을 거쳐 단숨에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였다가 남원 인월역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격파되었다. 이 때에 박수경(朴修敬) · 배언(裵彦) 두 장수와 사졸 500여 명이 이곳에서 전사하여 냇물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보아,이 산성은 늦어도 고려 말에는 축성되어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동국여지승람』에는 “사근산성은 군의 동쪽 17리, 사근역 북쪽에 있다. 둘레가 2, 79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 안에 못이 세 군데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오래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산성을 처음 쌓은 때는 6세기 중엽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대부분 능선을 따라 바깥쪽 벽만에만 돌을 쌓는 편축(片築)의 방식으로 길고 네모난 돌을 ‘품(品)’자형으로 쌓았다. 다만 바닥 부분쪽에는 네모나거나 길고 네모난 다소 큰 돌을 쌓았던 반면, 위로 올라갈수록 얇고 길면서 네모난 돌과 두께가 넓은 돌을 일정한 규칙이 없이 번갈아 쌓기도 하였다. 아마도 여러 차례 보완하거나 고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평열을 맞추기 위한 1열 축조, 2열 축조 기법도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2열 축조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벽의 너비는 대체로 5m 내외이고, 최대 잔존 높이는 4.4m 정도이다.
성벽은 현재 대부분 무너져 돌더미로 쌓여 있거나 1m 안팎의 밑부분만 남아 있지만, 동북쪽 골짜기에는 원래의 모습을 갖춘 일부 성벽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다만 자연스럽게 봉우리들을 감싼 채 쌓여 각루, 치, 망대 등 특별한 시설이 없어도 여러 곳을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성 안에서는 건물터와 문터가 확인되었고, 지름 14m 정도의 둥근 석축연못도 발견되었는데, 대체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아래 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축성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문터는 남문만 명확하게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너비 2.5m, 길이 6m 정도이다. 산성의 정상부 쪽에는 봉수대로 추정되는 둥근 석축이 남아 있지만 성벽과는 다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은 물이 일정 정도 차면 넘치도록 일부 구간이 절개되어 있어 이채롭다. 산성 아래의 북쪽 물가에는 정여창(丁汝昌)을 향사(享祀)하는 남계서원(濫溪書院)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마안산성(馬鞍山城)이 가까이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성벽의 너비는 4∼9m로 편차가 매우 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지형에 따라서 편축에 의한 뒷채움 너비를 달리 했기 때문이다. 곧 능선의 암반에 쌓은 부분은 상대적으로 폭이 좁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분은 너비가 넓다. 서쪽벽 일부에서는 길이 8m 정도로 바깥쪽 벽면의 받침 부분을 보강하여 쌓은 흔적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단 보축의 단면은 직각삼각형인데, 바깥쪽 벽의 받침 부분 암반을 계단 모습으로 깎아내고 안쪽에 흙과 막돌을 다져 넣고서 바깥쪽 경사면을 돌로 쌓아 만든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을 비롯하여 창녕 목마산성(牧馬山城), 거창 거열산성(居列山城), 거제 폐왕성(廢王城) 등 신라 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사근산성은 고대 산성의 축성 기법이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특히 7세기 경 신라 산성의 축성 기법이 잘 나타나고 있어, 7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의 각축전이 심하게 전개되었던 이 지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남해안을 통해 영남과 호남 지방에 출몰하였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대표적인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