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곡리패총(海南郡谷里貝塚)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에 있는 초기 철기시대 집터와 토기 가마터 등이 발굴된 조개더미 유적이다. 생활유적의 연대 추정은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이 유적은 14개의 층을 5개의 문화층으로 설정하여 호남 지역 고고학적 편년 연구의 기준이 된다. 토기 가마 등 생산과 관련된 유구도 확인되어 철기시대부터 취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유적 내 출토된 화천과 현무암 태토의 토기는 영산강 유역-해남반도-제주도의 문화 교류 양상을 추정하게 한다.
육지의 최남단인 땅끝(토말)과 인접한 곳으로 가공산 서쪽 기슭의 낮은 구릉에 자리한다. 유적이 있는 구릉은 과거 바다였던 백포만 방향으로 돌출되었는데, 비교적 평탄한 구릉 사면에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으며, 구릉의 말단은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1983년 처음 확인된 이후,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차에 걸쳐 목포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3차에 걸친 발굴 조사에 근거하여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3년 7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남군곡리패총은 표토층과 기반층을 제외하고 14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된다. 보고서에서는 Ⅰ~Ⅴ기층으로 묶어 설명하였다.
Ⅰ기층(12-14층)은 덧띠토기 등이 출토된 층으로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한다. Ⅱ기층(9-11층)은 경질민무늬토기가 화천(貨泉), 철기, 골각기(骨角器) 등과 함께 출토되는 층으로 조개껍데기의 퇴적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Ⅲ기층(8층)은 토제 곱구슬과 점뼈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Ⅳ기층(5-7층)에서는 경질찰문토기와 회색연질토기가 출토되었다. Ⅴ기층(1-4층)은 타날문토기가 출토되는 시기이다.
이와 같은 층서적 현상에 근거하여 해남군곡리패총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사회와 대형 독무덤 사회의 중간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해남군곡리패총에서 확인된 토기 가마는 지하에 굴을 파고 만든 지하식 굴가마로서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다. 이것은 고정된 상부 구조를 갖춘 토기 가마가 사용되기 시작하는 3세기 대 가마로 본다.
해남군곡리패총의 토기 가마는 해상 교역로의 거점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기초하여 외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된 지하 굴착식 축조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토착적 가마 구조의 특징도 남아 있어 토착적 가마 구조에 선진 기술이 가미되어 이 유적에서 일시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남군곡리패총에서는 중국 신(新)나라의 화폐 화천이 출토되어 호남 지역 철기시대의 연대를 비정하는 기준이 된다. 최근 광주복룡동유적에서 화천이 출토됨에 따라 해남군곡리패총과의 문화적 교류를 상정하기도 한다. 화천을 비롯한 중국의 화폐는 서남해안 연안에서 출토되는데, 출토 위치가 명확한 해남군곡리패총의 화천은 중국과 한반도, 일본 열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해양 교류의 시점을 추정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해남군곡리패총에서는 현무암과 관련된 태토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나주수문패총에서는 현무암 덩어리가 확인된 바 있다. 단정할 수 없지만 두 유적 내 제주산 현무암과 관련된 사례를 통해 영산강 유역-해남반도-제주도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 양상을 추정할 수 있다.
최근 발간된 4~5차 조사보고서에서는 삼국시대 주거지가 8기 확인되었다. 조사가 완료된 6차 조사에서는 높은 중첩률을 보이는 삼국시대 주거지가 밀집된 현상이 관찰된다. 이를 통해 이곳이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철기시대, 삼국시대로 이루어진 연속적인 취락임을 알 수 있다. 추후 최근 조사 결과까지 반영된다면, 서남해안 내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취락의 이행 과정을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