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문은 조선후기 병오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이자 천주교 지도자이다. 서울에서 중인 출신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누나, 아내와 아들이 모두 순교했다. 1830년대 후반 선교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참여했다. 1839년 박해 이후 다른 신자들과 함께 순교자 행적인 『기해일기』를 작성하였다. 1844년 말 김대건 부제의 입국과 1845년 프랑스인 선교 사제 입국 과정에 참여했다.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자들과 함께 피신했으나 7월에 체포되었고, 9월 19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정하상(丁夏祥) 등과 함께 선교 사제 영입 운동에 나서 1830년대 후반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선교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참여했다. 1837년 1월에 주1 신부가 입국하자 그의 주2가 되어 함께 각지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돕고 신자들을 교육시켰다. 1839년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가족들이 모두 순교하자 자수하려고 했으나, 사제들의 만류로 피신하여 붙잡히지 않았다.
앵베르(Imbert)주3 주교로부터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조선 교회를 돌보라는 임무를 맡았다. 박해가 끝나자 이재의(李在誼), 최영수(崔榮受) 등과 함께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작성하였다. 동시에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교회를 재건하고, 다시 선교 사제 영입에 나서 1844년 말 김대건(金大建) 주4를 조선에 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1845년 주5 주교와 주6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김대건 부제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상해 원정에 참여했다.
상해에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와 같이 귀국한 뒤에는 돌우물골(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 신부댁의 집주인으로 있으면서 회장 역할을 수행했다. 1846년 6월, 중국 배와 접촉하기 위해 황해도로 갔던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김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같이 거주하던 신자들과 함께 사포서동(司圃署洞, 현재 서울 종로구 통인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해 7월 포졸들에게 붙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사형 언도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3일 후인 9월 19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주7, 1984년 5월 주8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