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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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천주교
인물
조선 후기 병오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이자 천주교 지도자.
이칭
덕승(德昇)
세례명
가롤로
이명
이재영(李在永)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97년
사망 연도
1846년
출생지
서울
주요 저서
『기해일기』
관련 사건
병오박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현석문은 조선후기 병오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이자 천주교 지도자이다. 서울에서 중인 출신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누나, 아내와 아들이 모두 순교했다. 1830년대 후반 선교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참여했다. 1839년 박해 이후 다른 신자들과 함께 순교자 행적인 『기해일기』를 작성하였다. 1844년 말 김대건 부제의 입국과 1845년 프랑스인 선교 사제 입국 과정에 참여했다.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자들과 함께 피신했으나 7월에 체포되었고, 9월 19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 병오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이자 천주교 지도자.
인적사항

세례명은 가롤로. 자는 덕승(德昇).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중인 출신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현계흠(玄啓欽)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고, 누나 현경련(玄敬蓮)과 아내 김 데레사, 아들 현은석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부친이 순교한 후 모친과 함께 동래에 가서 살았고 14세 때에 서울로 올라왔다. 1839년 이후 수배령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이재영(李在永)으로 바꾸고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주요 활동

정하상(丁夏祥) 등과 함께 선교 사제 영입 운동에 나서 1830년대 후반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선교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참여했다. 1837년 1월에 주1 신부가 입국하자 그의 주2가 되어 함께 각지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돕고 신자들을 교육시켰다. 1839년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가족들이 모두 순교하자 자수하려고 했으나, 사제들의 만류로 피신하여 붙잡히지 않았다.

앵베르(Imbert)주3 주교로부터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조선 교회를 돌보라는 임무를 맡았다. 박해가 끝나자 이재의(李在誼), 최영수(崔榮受) 등과 함께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작성하였다. 동시에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교회를 재건하고, 다시 선교 사제 영입에 나서 1844년 말 김대건(金大建) 주4를 조선에 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1845년 주5 주교와 주6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김대건 부제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상해 원정에 참여했다.

상해에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와 같이 귀국한 뒤에는 돌우물골(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 신부댁의 집주인으로 있으면서 회장 역할을 수행했다. 1846년 6월, 중국 배와 접촉하기 위해 황해도로 갔던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김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같이 거주하던 신자들과 함께 사포서동(司圃署洞, 현재 서울 종로구 통인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해 7월 포졸들에게 붙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사형 언도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3일 후인 9월 19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주7, 1984년 5월 주8이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기해일기』
『일성록(日省錄)』

단행본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2(천주교 수원교구, 2011~2012)
『(개정판)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와 순교』 (한국교회사연구소, 2021)
차기진, 「현석문」(『한국가톨릭대사전』 1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1839년(기해)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1846년(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주석
주1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1803~1839). 우리나라 이름은 정아각백. 조선에 들어와 전도하다가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우리말샘

주2

좇아서 섬김. 우리말샘

주3

프랑스의 가톨릭 주교(1797~1839). 1837년에 제2대 조선 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다음 해에 서울에 몰래 들어와 전도하다가,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당시의 전기(傳記)가 ≪기해일기≫로 간행되었다. 우리말샘

주4

부제품을 받은 성직자. 사제를 도와 강론, 성체 분배 따위의 집행을 하게 된다. 우리말샘

주5

장 조제프 페레올, 프랑스의 신부(1808~1853). 파리 외방(外邦) 전교회 소속으로, 김대건 신부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들어와 선교 활동을 폈다. 우리말샘

주6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 프랑스의 선교사(1818~1866). 한국식 이름은 안돈이, 안비리(安斐理). 1841년에 주교(主敎)가 되어 1845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조선 가톨릭 제5대 주교로 재직 중 순교하였다. 우리말샘

주7

죽은 뒤 복자품(福者品)에 오르다. 우리말샘

주8

죽은 후에 성인품(聖人品)으로 올리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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