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유(子由), 호는 청회(聽檜).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홍희(洪喜)이며, 어머니는 능안부원로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아버지 희가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사위여서 인조와 이종사촌 형제이다.
1613년(광해군 5) 처음 별제(別提)를 거쳐 목천현감이 되고 의금부로 전임되었다.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구굉(具宏)·신경진(申景禛) 등과 모의하니 아우 홍진문(洪振文)도 이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능창군(綾昌君)을 살해하자 능창군의 형인 능양군(綾陽君: 뒤의 인조)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집을 반환하자, 그의 집을 능양군에게 헌납하였다.
이들을 의심한 광해군이 능양군의 아버지 원종(元宗)이 죽었을 때 조객(弔客)들을 주시하였으나, 그는 두려움없이 끝까지 장례를 치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공조좌랑에 특진되고, 이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1625년 부평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1631년 공주목사가 되고, 선정을 베풀어 가의대부에 승진하고, 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남양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올랐다.
1644년 모친상을 마친 뒤 도총관, 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35년 병자호란 때 신경진 등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였으며, 그 뒤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남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