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정(仲正), 호는 조대(釣臺). 우찬성 황사우(黃士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황응규(黃應奎)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황섬(黃暹)이며, 어머니는 풍성군(豊城君) 이전(李銓)의 딸이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생원시에 합격한 뒤,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시관이던 아버지가 그의 글을 알아보고 급제를 취소하였다.
뒤에 음보(蔭補)로 출사하였다가 1605년(선조 38) 교관(敎官)으로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전적·병조좌랑을 지내고 홍문관에 들어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될 때 아버지 섬이 유영경의 처남인 관계로 파직되자, 그도 벼슬을 버리고 풍기(豊基)에 따라가 은거하였다. 뒤에 고산·금교의 찰방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