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황주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황주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황해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서흥군, 서쪽은 안악군과 평안남도 용강군, 남쪽은 봉산군, 북쪽은 평안남도 중화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36′∼126°04′, 북위 38°33′∼38°51′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873.62㎢, 인구 16만 595명(1944년 현재)이다. 2개 읍 11개 면 132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황주읍 제안리이다.

자연환경

언진산맥의 여맥이 남부 군계를 뻗어내려, 남쪽에 자비산(慈悲山, 691m)·보명산(保命山, 584m)·가마봉(可馬峰, 481m)·정방산(正方山, 480m), 중앙에는 삼봉산(三峰山, 347m)·천주산(天柱山, 385m)·두암산(斗巖山, 236m) 등의 산이 솟아 있다.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대규모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어, 북쪽의 평양준평원과 함께 낙랑준평원에 연속되는 황주준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준평원은 중앙산지에 의해 북부의 매상천(梅上川) 유역과 남부의 황주천(黃州川) 유역으로 분리되며, 면내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를 합류해 망상유로(網狀流路)를 형성하면서 군 서부를 남류하는 대동강으로 모두 유입된다. 또한 재령강이 군 남서부를 북류하다가 대동강과 합류하고, 합류지점인 삼전면에는 하중도인 철도(鐵島)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은 고생대 조선계의 대석회암통이 분포한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며, 기온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연평균기온 10.3℃, 1월 평균기온 -8.9℃, 8월 평균기온 26.1℃, 연평균강수량 849㎜이며, 대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우리 나라 소우지역에 속한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겸이포읍에서 대규모의 신석기시대 유적과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으므로 황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군내 심촌리와 고연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5곳이 발굴되었고, 정방산에서 발견된 탁상식 및 기반식의 형태가 혼합된 200기 이상의 지석묘군에서도 마제석검·석촉·석부·반월도·세형동검·오수전(五銖錢) 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문화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유적도 순천리·천주리·청룡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우동어홀(于冬於忽) 또는 동홀(冬忽)·동울(冬鬱)이라 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경덕왕 16)취성군(取城郡)으로 고쳤으나, 실제로 행정조직이 편성된 것은 9세기 초엽 헌덕왕 때로 짐작된다. 정방산에는 898년(효공왕 2)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성불사(成佛寺)가 있으며, 창건 당시 안치했다는, 두 팔이 결락된 철불(鐵佛)이 안치되어 있다.

[고 려]

태봉 때인 905년경황주로 지명이 정해져 오늘에 이른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당시 대호족의 하나였고 뒤에는 대표적인 문벌귀족으로 등장하는 황보씨(皇甫氏)가 이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牧)이 두어질 때 그 가운데 하나로서 황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에는 절도사주(節度使州)로 개편되어 천덕군(天德軍)이라 부르고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그 뒤 1012년(현종 3)에 절도사가 폐지되고 대신 안무사(安撫使)가 두어졌다가 1018년에 다시 목으로 되었다. 이 무렵에 봉주(鳳州)·신주(信州)·토산현(土山縣) 등을 속현으로 거느린 때도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 오도(五道)·양계(兩界)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서해도(西海道)에 속하였다. 1217년(고종 4) 거란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 해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1269년(원종 10)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예속되었다가 9년 만에 환속되었다.

평안도로부터 한반도 중심부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 거란 외에도 몽고·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여러 번 전화를 입었다. 1356년(공민왕 5) 반원정책이 추진될 때 황주목으로 환원되고 다시 목사가 부임하였다. 뒤에 서북면(西北面)에 이속되었다가 1388년(우왕 14)에 다시 서해도에 소속되었다.

[조 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황주목이라 했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시되어 극성(棘城)에 진(鎭)이 설치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호구는 총 2,034호, 5,219인이었다.

1449년(세종 31) 황해도병마도절제사영을 다시 설치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황주에 두기로 했던 것이 해주로 이전되어 황주에 관찰사영이 잠시 두어졌다. 그 뒤 폐지되었던 황해도 병영이 1593년(선조 26) 다시 두어져 1601년부터 황주가 병영 소재지로 정착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을 치른 뒤 정방산성(正方山城)을 개수하여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군사를 이끌고 정방산성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는 사절이 황주에서 많이 유숙했으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 객관 동쪽에 있는 태허루(太虛樓)였다. 인구는 1759년(영조 35)에 1만 644호, 5만 2520인이던 것이 1828년(순조 28)에는 7,170호, 2만 7548인으로 감소하였다. 순조 때에 황강현(黃岡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다시 황주목으로 회복되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황주군으로 고쳐져 평양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에 다시 개편되면서 황해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0년 일본에 합병된 이후 여러 사회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가운데서도 1930년대 초엽에 진행된 가타쿠라농장(片倉農場)의 소작쟁의는 일본인 농장주에 결연히 맞서서 결국 군수와의 담판을 통해 소작인들의 요구를 관철한 소작쟁의사상 특기할 만한 일의 하나로 꼽힌다.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한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이승만(李承晩)의 뒤를 이어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박은식(朴殷植)이 이 곳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밖에 광복군 소대장으로 활약했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한 오흥운(吳興雲), 일본군 내 한국군사의 초모공작을 하다가 광복 후 상해교민의 귀국 알선에 진력한 김룡(金龍) 등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1930년 겸이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37년 황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겸이포읍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고, 심촌리·고연리와 정방산에서는 지석묘를 비롯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순천리·천주리·청룡리 등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이 각각 발견되었다.

또한 황주군은 북쪽으로 대동강과 인접해 있고 서북쪽으로 통하는 큰길이 군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어 예로부터 국방의 요충지가 되었으므로 곳곳에 방어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주읍성을 비롯해 정방산과 덕월산(德月山)의 산성, 그리고 황주읍 남쪽 8㎞ 지점에 신라 때 수축되었다는 극성진 등이 그것이다.

황주 동쪽 16㎞ 지점의 산속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던 길에 손수 물을 떠 마셨다는 왕림천과, 여기에서 목을 축이고 내려가다 잠시 쉬었다는 소식현이라는 고개가 있다. 또한 재령강과 대동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철도는 말을 사육하는 목장과 유배지로서 유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켰던 정운경(鄭雲慶) 등 애국열사가 이 곳에 유배되었다. 누각으로는 옛날 황주 객관의 동쪽에 있던 태허루와 읍성 남쪽 강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 월파루가 있으며, 옛날의 통북로에는 고동선역과 경천역의 유지가 남아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588년 중국 송대의 주자를 배향한 백록동서원이 설립되어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661년(현종 2) 사액되었으며, 1687년(숙종 13) 이이(李珥)·김굉필(金宏弼)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밖에 지방에는 서당이 설치되어 한문교육을 실시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신교육령이 발표되면서 군내의 선각자들은 곳곳에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황주명덕국민학교가 개교했으며, 이를 계기로 1936년까지 1면 1교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사립학교로는 1915년 황주양성학교, 1910년 양몽학교, 1922년 철도홍명학교, 1924년 미국인 사모엘이 건립한 영풍양성학교 등이 계속 설립되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1933년 농업실습학교, 1935년 일본인을 위한 고등여학교, 송림제철소에 기능공양성소가 있었다.

또 1937년 춘광원예학교, 1942년 겸이포공립공업학교 등이 설립되어 중등교육기관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나 취학 학생수에 비해 학급수가 부족해 타지역으로 통학했으며, 경제사정이 허락하는 경우에는 평양·서울 등지로 유학을 갔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5개교, 중등학교 4개교가 있다. 종교상황은 불교사찰 8개, 천주교성당 5개, 개신교교회 36개, 안식교교회 2개가 있다. 한편 이 지역의 독특한 민속문화나 행사는 없지만 향토민요로 〈감내기〉와 〈사과따는 처녀〉가 전해오고 있다.

산업·교통

대동천·재령강을 비롯해 황주천·매상천 연안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비옥한 평야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남부 봉산군과의 경계지대에 극성평야(棘城平野)가 형성되어 있으며, 재령평야의 일부 지역에 속해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토양은 석회암의 용식토인 테라로사(terra rossa) 토양으로서 보수력이 강해 강수량이 비교적 적은 이 지역의 농경에 적합하며, 밭농사에도 유리하다. 관개수리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으며, 각종 농산물의 생산량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수수·팥·콩·목화·채소 등이다. 또한 지형적 조건이 과수재배에 적합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특히 황주사과는 생산량이 전국 제1위로 일본·중국·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사과초·사과브랜디 등도 생산되며, 원예학교도 설립되어 다양한 사과부산물을 생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삼전면 석천리에서 갈대를 원료로 만든 석천삿자리를 비롯해 황주엿·여석(礪石) 등이 있다. 삼전면 철도리에서는 농어·숭어·가물치·참게 등이 잡힌다. 공업은 제철공업이 두드러지게 발달했는데, 이 군의 근대적 발전은 겸이포읍의 솔매[松林坊]라고 불리던 대동강변의 어촌에 불과한 지역이 공업도시로서의 비약적인 발전에 기인한다.

일본은 청나라 및 러시아와 전쟁을 하면서 송림항의 천혜적인 여건을 이용해 대도시로 발달시킬 계획을 세워 실현에 착수하였다. 즉 황주·재령의 철광, 안악의 석회석, 사동(寺洞)·승호리의 석탄 등 주변 지역의 지하자원이 풍부해 원료와 동력을 공급할 수 있으며, 전쟁 때 군수보급물자의 육양지(陸揚地)로서 최적합지이고, 대동강 하구의 수심이 깊어 대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하고 철도·국도 등 교통이 편리해 공업도시로서 급성장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1908년 경의선이 준공되었고, 송림선의 부설을 계기로 발달이 가속화되었다. 1910∼1914년 국가기간사업의 하나로 송림제철소를 건설했으며, 제철·제강·압연의 일관작업을 하는 최초의 근대적 제철공장으로 조강·강철·코크스·벤졸·나프탈린 등이 생산되었다.

교통은 경의선이 군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삼호·황주·흑교 등 여러 역이 설치되어 있고 황주역에서 송림선이 분기해 군 서부를 동서로 통과한다. 도로는 경의선과 병행해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황주∼송림, 황주∼수안, 흑교∼송림간의 3등도로가 통과해 편리한 편이다.

수운은 대동강·재령강·황주천 등이 이용되며 수륙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주요 관광지로는 황주읍의 태허루·월파루·황주읍성·덕월산성, 구락면의 왕림천·소식현, 주남면의 정방산, 삼전면의 철도(鐵島) 등이 있다.

읍·면

[겸이포읍兼二浦邑]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51.53㎢, 인구 1만 729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용복리이다. 본래 황주군 지역으로 송림방(松林坊)에 속했으나 일제강점기에 개발되어 1914년 송림면이 되었으며, 1916년 겸이포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0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곳곳에 그리 높지 않은 월봉산(月峰山, 167m)·송림산(松林山)·학마산(鶴馬山)·금산(金山) 등의 구릉이 솟아 있을 뿐 대부분 지역이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읍의 서부에 대동강이 남북으로 흐르며, 북쪽에는 대동강의 지류인 매상천이 북부를 동서로 곡류하며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농업은 근교 외곽지대에서 행해지며, 쌀·조·감자·콩·녹두 등이 산출되고, 과수원이 많아 유명한 황주사과의 생산지이다. 수산업은 오류리·연봉리 등 강안(江岸)지역에서 농업과 겸업으로 행해지며, 숭어·농어·갈치·가물치 등이 어획된다.

제조업이 주 산업으로 손꼽히는 주요 공업도시이다. 1914년에 일본의 미쓰비시(三菱) 재벌에 의해 용광로 3기와 압연공장·제강소·화학공장·코크스공장·저탄장 등이 건설되어 중공업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선철·강철·강판·코크스·콜타르피치·벤졸·나프탈린·암모니아·황산·탈유·내화벽돌 등이 생산되었다.

교통은 황주∼송림간 철도가 부설되어 있으며, 황주읍과 2등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흑교(黑橋)·중화(中和) 방면과 삼전(三田)·심촌(沈村)·사리원 방면과도 도로가 연결되어 매우 편리하다. 또한 항만·하천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해 평양·진남포·인천 등지와 해상왕래가 빈번하였다.

유적으로는 건지산(乾之山)에 송림사(松林寺)와 송방사(松房寺)가 있으며, 월봉산에 봉화대지가 있다. 이 밖에 선정(蟬井)과 학선정(學蟬亭)이 있으며, 이 정자 서쪽에 세석지(洗碩池)와 봉미오(蜂尾塢)라는 언덕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와 겸이포공립공업학교·겸이포공립고등여학교, 그리고 제철소기능공양성소가 있다. 용복(龍伏)·자운(紫雲)·대송(大松)·산서(山西)·월봉(月峰)·송산(松松山)·대흥(大興)·운곡(雲谷)·철산(鐵山)·인수(引水)·오류(五柳)〉·대동(大同)·송림(松林)·저전(楮田)·독산(禿山)·신흥(新興)·은하하(銀河)·분두진·강포(江浦)·당산(堂山)·연봉(臙峰)·난탄(蘭灘)··마산(馬山)·성거(聖居)·우진(雨津)·석탄(石灘)·대진(大津) 등 27개 이가 있다.

[황주읍黃州邑]

군의 중부에 위치한 읍. 면적 41.26㎢, 인구 1만 694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황강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제아면(齊安面)으로 되었으며, 그뒤 황주면(黃州面)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북쪽에 천주산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200m 이하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고,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이 면의 남부를 북서류하다가 여러 작은 지류를 합류해 대동강으로 유입되며, 어초천교가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교적 대규모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시설도 잘 갖추어져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다. 또한 과수재배가 활발하며, 사과는 황주사과라 해 품질이 우수하고 외국에도 수출되었다. 특산물로는 하방다리엿이 있는데 수수를 원료로 만들어 맛이 독특하다.

교통은 경의선이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황주역이 설치되어 있고, 서쪽으로 송림선이 분기한다. 도로는 경의가도가 중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황주∼송림간의 3등도로가 북서부를, 황주∼수안간의 3등도로가 동남부를 통과한다.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었으며, 구성·영풍·천주·인교·주남·도치 등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황주읍성·덕월산성·월파루·태허루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 중등학교 2개교가 있다. 황강(黃崗)·덕월(德月)·적벽(赤壁)·성남(城南)·벽성(碧城)·제안안(齊安)·예동(禮洞)·동천(東天)·신상(新上)·성북(城北)·운봉(雲峰) 등 11개 이가 있다.

[구락면龜洛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92.230㎢, 인구 6,90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우리이다. 남쪽은 자비산·금수산(金水山, 598m)·군장산(軍將山, 534m) 등이 솟아 산악지대를 이루며, 북쪽에는 월이산(月移山, 203m) 등 낮은 구릉이 기복되어 있다.

이들 남북산지 사이를 황주천이 서류하다가 황주읍으로 흘러들어 가며,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박산·영암·구락 등의 평지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다. 또한 과수재배도 활발해 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공업은 덕우리에 농기구공장이 있어 농기구·가마솥 등이 대량 제조된다. 교통은 황주∼수안간의 3등도로가 중앙을 통과하며,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황주·인교·도치·서흥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덕우리의 지석묘, 남점산성지(南岾山城址), 여계산성지(餘界山城址), 심원사(心源寺), 석가본존을 모신 보광전(普光殿), 강선대(降仙臺), 왕림천(王臨泉), 소식현(少息峴)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2개교가 있다. 덕우(德隅)·구락(龜洛)·미산(眉山)·박산(朴山)·인훈(仁訓)·장평((長坪)·영암(靈巖)·월이(月移)·구룡(龜龍) 등 9개 이가 있다.

[구성면九聖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0.69㎢, 인구 7,52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산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성면(慕聖面)이 구성면으로 되었다. 동쪽에는 침산(砧山, 80m), 서쪽에는 금산(金山, 148m) 등의 낮은 구릉이 기복되어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이 면의 서남부를 서류하다가 대동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대규모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시설도 잘 갖추어져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며, 특히 콩은 품질도 우수하고 생산량도 군내에서 으뜸이다.

광업은 북부의 모성방(慕聖坊)과 금산 북쪽사면에서 철광석을 채광해 송림제철소로 수송한다. 경의선이 면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송림선이 남부를 동서로 통과한다. 그러나 역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인접되어 있는 장천·송림 등의 역을 이용한다.

도로는 황주∼송림간의 3등도로가 중앙을 통과하며,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개설된 등외도로가 청수·영풍·삼전·송림 등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석산(石山)·용궁(龍宮)·화동(和洞)·구림(九林)·용두(龍頭)·죽대((竹垈)·청운(靑雲)·서정(西井) 등 8개 이가 있다.

[도치면都峙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1.80㎢, 인구 5,48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도치리이다. 언진산맥의 여맥이 뻗어내려 남쪽에 보명산·약수산(藥水山, 541m)·횡기산(橫氣山, 595m)·가마봉 등이 동서로 연이어 솟아 있다. 또한 그 여세가 서북으로 뻗어 군장산을 이루고, 다시 면내로 뻗어내려 무설산(舞雪山, 461m)이 솟아 남부는 대체로 산악지대를 이룬다.

황주천이 면의 북부를 서류하며,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시설도 잘 갖추어져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며, 특히 콩은 품질도 우수하고 생산량도 군내에서 으뜸이다.

교통은 황주∼수안간의 3등도로가 북부를 통과하며,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황주·주남·구락 및 봉산 등과도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도치(都峙)·노동(蘆洞)·성동(城洞)·상산(商山)·가와(加瓦)·대송(大大松)·금송(金松) 등 7개 이가 있다.

[삼전면三田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8.17㎢, 인구 6,78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내송리이다. 중앙에 관대산(冠帶山, 182m)·주렴산(珠簾山, 161m)·봉화산(烽火山, 216m) 등이 삼각형을 이루어 대체로 산악지대를 이룬다. 황주천이 면의 북쪽을 곡류하며, 재령강이 서남쪽을 흐르고 서쪽에 대동강이 흘러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교적 대규모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시설도 갖추어져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수수 등이며, 특히 콩은 품질도 우수하고 생산량도 많다.

특산물로는 석천리에서 삿자리가 생산되는데 갈대를 원료로 만든 자리의 일종이다. 교통은 작은 도로들이 지나고 인근의 송림선이 이용된다. 특히 수운이 발달되어 도선시설이 잘 되어 있고, 선박도 비교적 많아 육상교통보다 편리하다. 또한 재령강 하류에 하중도인 철도리가 있는데, 연안에서 농어·숭어 등이 많이 잡히며 옛날부터 교통·국방상의 요지로서 내외국 선박의 기항지였다.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유배지가 되기도 했으며, 국마(國馬)를 기르는 목장도 있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내송(內松)·외송(外松)·석천(石泉)·용전(龍田)·철도(鐵島) 등 5개 이가 있다.

[영풍면永豊面]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8.13㎢, 인구 3,90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냉정리이다. 일부 지역이 100m 이하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이 면의 남부를 곡류하다가 대동강으로 유입되며,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채소 등이며, 특히 배추와 무는 품질이 우수하다. 특산물로는 영풍안골엿이 있는데, 찹쌀을 원료로 만들어 맛이 독특하다.

경의선이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역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인접되어 있는 황주역을 이용한다. 또한 송림선이 북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장천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각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황주·구성·삼전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고, 대체로 철도의존율이 높다.

유적으로는 냉정리의 광조사(廣照寺)·진철대사보일승공탑비(眞澈大師寶日乘空塔碑)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냉정(冷井)·이정(梨井)·신정(新井)·동산(東山)·영풍(永豊)·성재(成成財)·냉천(冷泉) 등 7개 이가 있다.

[인교면仁橋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3.09㎢, 인구 6,86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소매리이다. 북쪽에는 장군산(將軍山, 272m)·삼봉산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내려 대부분의 지역이 200m 내외의 구릉지대를 이룬다. 구릉 사이를 소매천(小梅川)이 지류를 합류하면서 동북부에서 내려오는 묵치천(墨峙川)과 합류해 황주천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지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다. 또한 과수재배가 활발하며, 사과는 황주사과라 해 품질이 우수하다. 창대리에서 천연 슬레이트가 산출되어 주택지붕개량에 큰 몫을 한다.

교통은 소매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황주·천주·구락 및 서흥군·중화군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소매(小梅)·창대(昌垈)·인제(仁濟)·묵치(墨峙)·상매(上梅)·여이(汝汝伊)·천파(川波)·문수(文秀)·능산(陵山) 등 9개 이가 있다.

[주남면州南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5.31㎢, 인구 7,43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내함리이다. 동쪽에는 삼봉산(三峰山, 365m), 남쪽에는 정방산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내려 남부는 산악지대를 이루고, 북쪽은 증산(甑山, 145m) 등 구릉도 있지만, 대체로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의 지류가 면의 동부를 흐르며,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팥 등이다. 또한 과수재배도 활발해 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경의선이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나, 역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인접지역의 황주·심촌 등의 역을 이용한다. 이와 거의 병행해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개설된 등외도로가 황주·도치·청룡·봉산 등과 연결되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유물·유적으로는 정방산성, 극성진, 성불사의 극락전(極樂殿)·응진전(應眞殿)·오층석탑·철불·거종(巨鐘), 정방리의 지석묘 등이 있다. 내함(內咸)·소선(小仙)·정방(正方)·순천(順天)·대세(大稅)·율목목(栗木)·이우(梨隅)·금산(金山) 등 8개 이가 있다.

[천주면天柱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1.11㎢, 인구 9,88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내동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천면(敬天面)을 병합하였다. 남쪽에는 천주산·삼봉산 등이 솟아 있으며, 중앙에는 상마산(上馬山, 308m)이 동서로 뻗어내려 북부의 매상천과 남부의 영풍천(永豊川)이 분수령을 이룬다.

하천 연안에는 비교적 대규모의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팥 등이다. 경의선이 서부면계를 남북으로 통과하나, 역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인접지역의 황주·흑교 등의 역을 이용한다.

이와 거의 병행해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그 밖에 내동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지역에 개설된 등외도로가 황주·인교·구성·흑교 및 중화군 등과 연결되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르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내동(內東)·장좌(長佐)·용계(龍溪)·봉진(鳳進)·구이(九伊)·경천천(敬天)·이동(梨洞)·내교(內橋)·와동(瓦洞)·외두(外斗)·외하(外下)·외상(外上) 등 12개 이가 있다.

[청룡면靑龍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7.72㎢, 인구 1만 110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소관리이다. 동북쪽은 100m 이하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를 이룬다. 재령강이 서강(西江)·수합천(水合川) 등과 합류하면서 면의 서남부를 북류하다가 대동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재령평야의 북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다. 광업은 청룡광산에서 한때 중정석(重晶石)이 생산되었다. 경의선이 동남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심촌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거의 병행해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개설된 등외도로가 삼전·영풍·주남 및 봉산군·안악군 등과 연결되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소관(小串)·포남(浦南)·포북(浦北)·구로(九老)·화산(華山)·상비비(上比)·인덕(仁德)·청룡(靑龍) 등 8개 이가 있다.

[청수면淸水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59㎢, 인구 7,60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광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림면(九林面)과 청원면(淸源面) 일부가 병합되어 청수면이 되었다. 북쪽은 100∼200m 정도의 구릉이 동서로 기복되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를 이룬다.

매상천이 면내에서 발원한 작은 지류를 합류하면서 곡류하다가 대동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시설도 잘 갖추어져 주요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마늘 등이다. 또한 과수재배도 활발해 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농가부업으로는 축우·양돈·고공품(藁工品)제조 등이 이루어진다. 광업은 청원리에서 철광석이 생산된다. 교통은 경의선의 흑교역과 송림간의 3등도로가 면 중앙을 통과하며,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개설된 등외도로가 흑교·구성·송림·중화 등과 연결되어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금광(金光)·묵천(墨川)·토정(土井)·진교(榛橋)·원정(遠井)·청원원(淸源)·석평(石坪)·인포(仁浦) 등 8개 이가 있다.

[흑교면黑橋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87.94㎢, 인구 1만 507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흑교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정면(高井面)과 목곡면(木谷面) 일부를 병합해 흑교면이 되었다. 북쪽에는 삼봉산(三峰山, 112m)·정수봉(淨水峰, 186m)·고정산(高井山, 296m) 등이 솟아 있으며, 동남쪽은 넓은 평지를 이룬다.

흑교천(黑橋川)은 면내에서 발원한 작은 지류를 합류하면서 흐른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시설도 잘 갖추어져 주요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콩·팥 등이다. 또한 과수재배가 활발해 구릉지대 및 강변일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사과의 명산지가 되었다.

광업은 남부 면계지역에서 철광석이 생산된다. 경의선이 면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흑교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거의 병행해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흑교역∼송림간의 3등도로가 흑교역에서 분기한다. 그 밖에 각 주요지역에 개설된 등외도로가 청수·구성·천주·중화 등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흑교(黑橋)·정수(淨水)·내로(內蘆)·정자(亭子)·원동(院洞)·고정정(高井)·용연(龍淵)·용정(龍井)·청천(淸川)·흑천(黑川)·금석(金石)·빙량(氷梁)·장사(長沙) 등 13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황해북도 북서부에 있는 군. 동쪽은 연탄군과 평양특별시 상원군, 서쪽은 대동강과 재령강을 사이에 두고 남포직할시와 황해남도 재령군, 남쪽은 봉산군, 북쪽은 평양특별시 강남군·중화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35′∼125°58′, 북위 38°34′∼38°51′ 사이에 있으며, 면적 512㎢, 인구 16만 81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봉리·칠봉리가 연탄군으로, 문현리가 봉산군으로, 석탄리가 송림시로 편입되었고, 황주읍·영풍면·구성면·청수면·흑교면·천주면·주남면〉·청룡면·삼전면 등으로 개편되었다. 1954년 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눌 때,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황주읍과 신상(新上)·운성(雲城)·선봉(仙峰)·순천(順天)·심촌(沈村)·삼정((三井)·대동(大同)·석산(石山)·용궁(龍宮)·청운(靑雲)·광천(光川)·인포(仁浦)·석정(石井)·흑교(黑橋)·고연(高淵)·용천(龍川)·금금석(金石)·장사(長沙)·내외(內外)·삼훈(三勳)·천주(天柱)·철도(鐵島)·외상(外上)·포남(浦南)·구포(九浦)·청룡(靑龍)·삼전(三田)·장천(長川) 등 1개 읍 28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황주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평양에서 계속되는 낙랑준평원(樂浪準平原)의 남쪽 끝부분이 되어 침산(砧山, 80m)·두암산(斗巖山, 236m) 등의 잔구(殘丘)가 남아 있으나, 대체로 50m 이하의 파랑성 구릉이 연속된다. 이 준평원을 개석하며 대동강으로 유입하는 매상천(梅上川)·황주강(黃州江)이 서쪽으로 흐른다.

동쪽은 삼봉산(三峰山, 347m)·천주산(天柱山, 385m)이 자연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정방산맥(正方山脈)이 봉산군과의 자연경계를 이루면서 정방산(480m)을 주봉으로 삼봉산(三峰山, 365m), 더 멀리 가마봉(可馬峰, 481m) 등으로 이어지면서 오랑캐의 남침을 막는 방어선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유일하게 협곡(峽谷)으로 뚫린 사인관골은 남북 교통로의 구실을 하였다. 서쪽의 경계를 이루는 재령강은 고재령만(古載寧灣)의 퇴적평야를 이루고, 북쪽은 매상천(梅上川)이 흐르며 낙랑준평원의 100∼200m의 잔구가 연속되어 평양특별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지질은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이라고 불리는 석회암층이 넓게 분포한다. 이 때문에 지하수가 깊어서 곳곳에 왕대정(王大井)·개정촌(開井村)·석정동(石井洞) 등과 같은 우물취락(井聚落)이 발달해 수십 개에 이른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9.8°, 1월 평균기온 -7.7°, 8월 평균기온 24.7°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34㎜이다. 첫서리는 10월 16일경에, 마감서리는 4월 20일경에 내린다.

토양은 산림갈색토가 가장 넓게 퍼져 있고, 석회적토도 많이 분포한다. 산림은 군 면적의 30% 가량을 차지하며, 소나무·참나무 등이 많다. 황주군에는 벽성군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드문 전갈[蝎]이 있다.

[산업·교통]

경지면적 중 논이 40%, 밭이 49%이며, 과수원이 10%나 된다. ‘황주사과’로 알려진 사과는 전국에 보급된 국광(國光)의 주산지였다. 벼농사 외에 옥수수·밀·조·콩 등의 산출이 많고, 양잠이 비교적 활발하다. 황주읍의 연지(蓮池)의 연꽃은 유명하다.

황주사과에 비길 만한 것에 포도단지가 있다. 1992년에 조성된 초물단지(草物團地)에서는 풀·나무줄기·잎·껍질로 모자·가방·신발 등을 생산해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교통은 군의 중앙을 평부선(平釜線) 철도가 종관하고, 군의 서쪽에는 평양·개성고속도로가 통해 있다.

[유물·유적]

정방산성(正方山城)은 보존이 잘 되어 북한의 명소로 꼽히고 있고, 대동강의 범람원인 철도(鐵島)에는 기자정(箕子井)이 있다. 황주향교(黃州鄕校)는 6·25로 파괴되고,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정방산성 안에는 성불사(成佛寺) 외에 도설천사(道說天寺)·안국사(安國寺) 등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성불사만 1957년에 재건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황해도지』(김용국 -황해도, 1970)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2)
『한국고고학지도』(한국고고학회, 1984)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이한순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