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료국(興遼國)은 1029년(현종 20) 발해 유민이 요동에 세운 부흥 국가이다. 1029년(현종 20) 8월 초에 요(遼)의 동경도(東京道) 관하에 있던 동경사리군상온(東京舍利軍詳穩) 대연림(大延琳)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고려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1030년(현종 21) 8월에 대연림이 사로잡힘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지 100년 후에 일어난 발해부흥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때까지 발해 유민 의식이 남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고려와 거란(契丹: 遼)이 세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치른 뒤,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쓰고 있던 시기인 1029년(현종 20) 8월 초에 요(遼)의 동경도(東京道) 관하에 있던 동경사리군상온(東京舍利軍詳穩) 대연림(大延琳)의 지휘하에 건국되었다. 대연림이 거란에 반기를 든 직접적인 원인은 거란이 소금과 술의 전매와 물품 교역에 대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해 발해인을 수탈하였고, 흉작으로 인한 생활고로 인해 반요(反遼) 감정이 첨예화되어 있었던 데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발해 멸망 후 끊임없이 지속되던 발해 유민의 반거란 · 발해부흥운동(渤海復興運動)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대연림은 발해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를 거점으로 그 주변의 발해인을 규합해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소효선(蕭孝先)과 그의 처 남양공주(南陽公主)를 동경성(東京城: 遼陽城)에 가두고, 호부사(戶部使) 한소훈(韓紹勳), 부사(副使) 왕가(王嘉), 사첩군도지휘사(四捷軍都指揮使) 소파득(蕭頗得) 등을 죽인 뒤 국호를 흥료(興遼), 연호를 천경(天慶, 『고려사(高麗史)』에는 천흥(天興))이라 하였다.
대연림은 당초 여진(女眞)의 호응과 고려와의 공동 작전을 통한 반거란 항쟁을 기대해, 건국 직후인 1029년 9월 초에 고길덕(高吉德)을 고려에 보내 건국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고려는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郭元)의 주장에 따라 압록강 동쪽의 보주성(保州城: 義州)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압록강 이동 지역의 공격과 관련해 거란의 자료인 「유일영묘지명(劉日泳墓誌銘)」에는 요부(遼府), 즉 흥료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국(東國), 즉 고려가 재빠르게 공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려가 압록강 이동의 거란 점유 지역에 대한 공격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공격에 실패한 뒤로는 거란의 남침에 대비해 같은 해 12월과 1030년 1월, 7월, 9월의 거듭된 흥료국의 지원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요에서는 1029년 10월 초에 남경유수(南京留守) 소효목의 지휘하에 국구상온(國舅詳穩) 소필적(蕭匹敵), 해육부대왕(奚六部大王) 소포노(蕭蒲奴) 등이 동경 요양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흥료국은 거란에 포위당한 지 거의 1년 동안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양상세(楊詳世)의 배반으로 1030년 8월 25일경에 요양성이 함락되면서 대연림도 사로잡혀 멸망하고 말았다.
흥료국의 멸망 원인으로는 발해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후 이미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라서 발해 유민들의 발해에 대한 국가 의식이 상실되었다는 점과, 고려 역시 발해계 거란인을 발해 유민이 아닌 거란인으로 여겨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리하여 발해 멸망 100년 후에 발생한 발해 유민들의 반거란 · 발해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 뒤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요의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사』에는 1030년부터 1033년에 이르는 3∼4년 동안 약 740명의 발해 유민이 흘러 들어왔다고 전한다. 이는 고려가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이러한 태도가 요동 지역의 발해인들이 고려로 와서 항복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대연림이 고려에 수차에 걸쳐 원군을 청했던 사실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역사 의식이 일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