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25대 충렬왕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308년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충렬왕
소재지
개성특별시
내용 요약

경릉(慶陵)은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25대 충렬왕의 능이다. 1308년 충렬왕은 사후 개성부의 서방 12리에 자리한 경릉에 안장되었다. 공민왕 대에 제릉전직을 선발하여 관리하게 하고, 1372년 공민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관리 소홀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25대 충렬왕의 능.
건립경위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308)은 재위 34년째인 1308년 7월 기사일에 73세의 나이로 신효사(神孝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1숙비(淑妃) 숙창원비 김씨의 저택에 마련되었고, 충선왕이 즉위하여 같은 해 10월 정유일에 경릉(慶陵)에 안장하였다.

이때 영구가 처음 떠나자, 충선왕이 직접 거친 베로 만든 상복〔최마질〕을 입고 손수 향로를 들고 걸어서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서야 주2를 타고 산릉(山陵)에 이르렀다. 장례를 마치자 크게 곡(哭)을 하고 돌아와서 상복을 벗었는데, 이는 이전에 일찍이 없던 효행이라고 여겼다.

변천

충렬왕 왕거(王昛)는 원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1274년(원종 15) 5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齋國大長公主)와 결혼하였고, 그해 6월 원종의 사후 귀국하여 8월에 왕위에 올랐다. 1298년 세자인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이 되었다가 몇 달 후 다시 왕위에 복귀하는 등 정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1308년 73세로 승하하여 경릉에 묻혔고, 주3은 24개월간 존속하였다.

왕의 신주는 1310년 9월 정축일에 태묘에 부묘하였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삼현리에 있는 묘련사(妙蓮寺)에 있다. 고려시대에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설치하여 담당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1371년(공민왕 20) 12월 기해일에 공민왕은 제릉서를 관할하는 주4를 법도에 맞게 정리하고, 제릉전직((諸陵殿直)을 새로 선발하였다. 그러한 다음 공민왕이 친히 1372년(공민왕 21) 11월에 충렬왕 경릉에 제사를 올렸다.

형태와 특징

경릉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개경에서 서쪽으로 12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개성특별시에 안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능제나 구조를 알 수 없다.

의의 및 평가

고려에서는 왕의 사후 묘호와 능호를 붙이는데, 원나라 간섭기에 묘호 대신 ‘충’ 자가 붙은 충렬왕으로 불렸지만, 무덤에는 능호를 붙여 경릉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고려사(高麗史)』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국통감(東國通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논문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 2019)
권두규, 「고려시대 능호 기재 양식과 수여 기준」(『한국중세고고학』 창간호, 2017)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 2013)
허흥식, 「고려의 왕릉과 사원과의 관계」(『고려시대연구』 Ⅰ, 2000)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국상(國喪)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    우리말샘

주2

고려 시대에, 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던 가마. 출퇴근하는 대관들과 그 자녀도 이용하였다.    우리말샘

주3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우리말샘

주4

고려 시대에,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제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문종 때에, 관제의 축소 개편으로 격하되어 ‘태상부’로 고쳤다. ⇒규범 표기는 ‘태상시’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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