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천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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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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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서경천도론은 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고 칭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서경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이 서경천도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인종대에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성장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묘청과 정지상 등이 도참설에 기반하여 서경천도를 주도하였다.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와 왕권의 위상을 둘러싼 국내정세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 서경천도는 평양이 고려의 확실한 영역이자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목차
정의
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
내용

고려를 건국한 태조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개발하여 이를 서경(西京)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성을 쌓았다. 제도적으로는 별도(別都)라고 하면서 개경에 버금가게 정비하였다. 또한 태조가 남긴 유훈인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는 후사 왕들에게 때때로 서경에 순주(巡駐)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을 통해 서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이 지역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경으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일거나 반란이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시기가 정종대(재위 945∼949)와 인종대(재위 1122∼1146)이다.

정종은 서경을 기반으로 한 왕식렴(王式廉) 세력의 도움으로 왕규(王規)를 진압하고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서경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서경에 왕성을 쌓고 개경의 민호(民戶)로 서경을 채우는 등 서경천도를 시도하였다. 얼마 안 되어 정종이 서거하면서 서경천도는 무산되었으나 당시 지나친 토목공사라 하여 반대가 상당히 심하였다. 광종대에는 서경 대신 역으로 개경을 황성(皇城)이라 칭하고 황성 체제를 강화하는 조처들이 마련되었다.

인종대의 서경천도론은 대내적으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과 대외적으로 거란족의 요(遼)가 망하고 여진족의 금(金)이 성장하는 국제질서의 대격변 속에서 대두되었다. 서경 출신이었던 승려 묘청(妙淸)과 서경 분사(分司)에 있었던 정지상(鄭知常),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 출신 인물들과 근시(近侍)였던 김안(金安) 등이 서경천도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1128년(인종 6) 서경 임원역(林原驛) 부근의 지세가 술사(術士)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라 하며 이곳에 새로이 궁궐을 지어 임어(臨御)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새 궁궐이 완성된 것을 계기로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 황제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대금(對金) 강경론도 제기되었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서경천도론과 대금 강경론에 대한 논란과 공방이 계속되던 중, 1135년(인종 13) 1월 묘청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며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을 필두로 하는 개경 진압군의 압박과 토벌로 이들의 반란은 최종적으로 1136년(인종 14) 2월에 진압되었다.

인종대의 서경천도론은 서경 출신 인물들이 도참설(圖讖說: 미래에 대한 예언)에 기반하여 새롭게 궁궐을 건설하고 개경에서 서경으로 아예 천도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는 새롭게 동북아의 패자로 등장한 금(金)에 대해 온건책과 강경책 중 어떠한 방법을 취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깊이 관계되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전통적인 풍수도참(風水圖讖)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고 비판할 것인가 라는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시기의 서경천도론은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와 왕권의 위상을 둘러싼 국내정세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이 시기 유행한 풍수도참설의 주요 주제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 멸망 후 사실상 폐허로 남겨져 있었던 평양의 의미가 고려시기에 재발견되고, 고려의 확실한 영역이자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의 연구: 개정판』(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0)
『고려시대의 도참사상』(이병도, 경인문화사, 1975)
「고려·조선 초 국도풍수 연구」(장지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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