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943∼945. 이름은 왕무(王武). 자는 승건(承乾).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이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한편,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 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해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백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박술희도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된 뒤 살해되었는데, 왕요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혜종이 죽자 왕요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