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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죽막동제사유적(扶安竹幕洞祭祀遺蹟)

    선사문화유적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 후기에 걸친 시기의 제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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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 후기에 걸친 시기의 제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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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국립전주박물관이 전라북도 서해안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1992년에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제사 유적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1) 자연환경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 곳 평탄면에 3세기 후반부터 조선시대에 해당되는 다양한 유물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 일대는 바다와 바로 접해 있는 해발 22m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낭떠러지 위로 주변보다 높다. 따라서 직선거리 20km 내의 서해상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 상왕등도(上旺登島), 위도(蝟島), 식도(食島), 비안도(飛雁島) 등의 섬들과 먼 바다까지도 바라보기에 유리한 지점이다.
    유적 바로 북쪽에는 육지로 10m 정도 만입(彎入)해 들어온 해식동굴(海蝕洞窟)이 있다. 그 주변으로도 역시 해식동굴이 많이 발달해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근처를 항해하던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곳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적 주변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조류가 급한데다가 주변에 섬들이 많아서 조류의 흐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물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하며, 겨울에는 계절풍이 심하게 불어와 큰 파도를 형성해 항해에는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평가된다.
    한편, 이곳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 중에서도 최선단(最先端)의 지점이다. 항해술의 제약 때문에 연안항해나 근해항해가 일반적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서해안 일대의 남북을 잇는 중요한 해상기점이 되어왔으며, 멀리 중국·왜 교류 때에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점이다.
    2) 유물
    유물은 현대의 해신당(海神堂)인 수역당(水城堂) 바로 뒤편의 평탄면(平坦面)에 8×13㎡의 범위에 약 30cm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다. 유물의 대부분은 삼국시대인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유물은 각종 항아리[壺], 기대(器臺), 독(甕), 잔(盞), 배부병(杯附甁) 등의 토기류와 쇠차[鐵鉾], 쇠살촉[鐵鏃], 찰갑편(札甲片), 쇠도끼[鐵斧], 말안장조각[鞍橋片], 행엽(杏葉), 동령(銅鈴), 동경(銅鏡), 불명철기 등의 금속유물, 도끼(斧), 거울(鏡), 손칼, 판갑(板甲), 낫, 말 등과 같은 실물을 모조한 석제·토제모조품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소옥(小玉), 곡옥(曲玉), 중국 도자(中國陶磁)가 소량 출토되기도 하였다. 금속유물은 대옹(大甕)의 내부에 넣어져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다. 석제모조품은 좁은 범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한편,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백자가 소량 출토되었다.
    3) 기능
    이곳은 예로부터 항해상의 위험한 장소이면서 항로의 중요한 기점이 되어왔고, 바다에서의 해상활동을 감시하기에도 유리한 지점이다. 따라서 항해상의 안전이나 어로와 같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한편, 종류가 다양한 유물들이 섞인 채 절벽 위 평탄면에 퇴적되어 있었다. 이는 이곳에서 제사와 같은 일정 목적에 유물을 사용하고 난 후 그대로 폐기하거나 의도적으로 파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곳은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진행된 해신제사의 내용을 출토유물을 통해 검토해보면 시대별로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전 기간에 걸쳐 4단계로 제사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Ⅰ단계(3세기 후반)는 마한(馬韓)의 제사로 볼 수 있다. 제사에는 둥근 바닥 짧은 목 항아리[圓底短頸壺]만 사용하였다. Ⅱ단계(4세기)는 마한·백제의 제사로 볼 수 있다. 제사에는 역시 항아리[壺] 중심의 토기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토기의 기종과 수량이 증가해 제사의 규모가 Ⅰ단계보다는 확대되었다.
    Ⅲ단계(5세기 전반∼6세기 전반)는 백제와 가야, 왜(倭)의 제사로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다. 먼저 백제의 제사에는 항아리[壺]·독(甕)·파배(把杯)·뚜껑접시[蓋杯]·병 등의 각종 토기와 토제모조품, 중국 청자를 사용했으며, 제사에 국가가 관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의 제사에는 쇠창[鐵鉾]·쇠도끼[鐵斧]·말안장[鞍橋]·동경(銅鏡) 등의 금속유물을 독(甕)에 넣어 공헌(供獻)하였다. 역시 국가나 최고지배층이 제사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의 제사에는 석제모조품이 사용되었으며, 일본에서 행해진 해신제사의 양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Ⅳ단계(6세기 중·후반∼7세기 전반)는 백제의 제사로 Ⅰ·Ⅱ단계처럼 제사에는 항아리[壺], 통형기대(筒形器臺), 곧은 입항아리(直口壺), 병 등의 토기만 사용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각 단계별로 진행된 제사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제사에의 관여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Ⅲ단계의 백제와 가야의 제사는 해상교섭의 필요성이 증대하던 시점에 국가적 차원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해상교류의 길목이나 중요한 기점에서 원거리 항해의 안전이나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위해 제사에는 토기뿐만 아니라 금속유물, 토제모조품, 중국 청자와 같은 특수 공헌물품을 다량으로 사용하였다. 그 외의 제사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이 연안을 통한 이동이나 어로활동과 관련해 별도의 공헌물 없이 소량의 토기만을 사용해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제사는 삼국시대의 Ⅳ단계처럼 소량의 토기나 청자, 백자 등을 제기(祭器)로 사용해 해상이동의 안전이나 풍어(豊漁)를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사양상은 현재 우리나라의 서해안 일대에 남아 있는 해양신앙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와가 출토되고,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수성당(水城堂)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부터는 노천제사(露天祭祀)를 벗어나 실내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연구」(『국립전주박물관 개관5주년기념 학술심포지움 논문집』,1998)

    •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국립전주박물관, 1994)

    • 「죽막동유적의 쇠퇴와 태안마애삼존불」(김주성,『한국상고사학보』40,한국상고사학회,2003)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유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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