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간)

장 담그는 과정
장 담그는 과정
식생활
물품
콩으로 메주를 쑤어 소금물에 담근 뒤에 그 즙액을 달여서 만든 장.
정의
콩으로 메주를 쑤어 소금물에 담근 뒤에 그 즙액을 달여서 만든 장.
개설

음식의 간을 맞추는 기본양념으로 짠맛·단맛·감칠맛 등이 복합된 독특한 맛과 함께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다.

간장은 농도에 따라 진간장·중간장·묽은간장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각각 짠맛·단맛의 정도와 빛깔이 다르므로 음식에 따라 쓰이는 용도가 각기 다르다. 담근 햇수가 1∼2년 정도되는 묽은간장은 국을 끓이는 데 쓰이고, 중간장은 찌개나 나물을 무치는 데 쓰이고, 담근 햇수가 5년 이상 되어 오래된 진간장은 달고 가무스름하여 약식(藥食)이나 전복초(全鰒炒)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예로부터 간장 담그는 일은 가정의 중요한 연중행사로 여겨, 메주만들기·메주띄우기·장담그기·장뜨기 등의 행사가 초겨울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간장 맛이 좋아야 음식 맛을 낼 수 있다 하여, 장을 담글 때는 반드시 길일을 택하고 부정을 금하였으며, 재료의 선정 때는 물론이고 저장 중의 관리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연원 및 변천

고구려고분인 안악삼호분(安岳三號墳)의 벽화에 우물가에 장독대가 보이고, 『삼국사기』에는 683년(신문왕 3)에 왕비 맞을 때의 폐백품목으로 간장과 된장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이미 장류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 소금과 장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과, 1052년(문종 6)에 개경의 굶주린 백성 3만여 명에게 쌀·조·된장[豉]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굶주린 백성을 위한 구휼식품은 적어도 생명유지를 위한 최저 기본식품이라야 한다. 이 구휼식품에 쌀·조와 같은 곡물과 함께 장과 된장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이미 장류가 필수 기본식품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록(要錄)』·『주방문(酒方文)』·『시의전서(是議全書)』 등 조선시대 조리서에는 대부분 간장제조법을 적고 있으며, 『산림경제』에도 25조목의 조장법(造醬法)이 보인다.

『증보산림경제』에 수록된 장담그는 법을 보면 “메주 한 말, 소금 여섯 내지 일곱 되, 물 한 통으로 하되 가을·겨울간에는 이보다 적게 하고, 늦은 봄에는 이보다 많이 한다. 메주는 잘 띄워서 다시 소금물에 깨끗하게 씻어서 쓰고, 항아리에 먼저 대나무로 겅그레를 만들어 그 위에 메주를 얹어놓고 끓여 식힌 소금물을 붓는다.”라고 하였다.

메주·소금·물의 비율이 1 : 0.6(0.7) : 2로 소금과 물의 양이 적은 좋은 간장을 담갔음을 알 수 있고, 계절에 따라 소금의 양을 조절하여 과학적으로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간장과 된장의 분리를 쉽게 하기 위해 대나무 겅그레를 만들어 쓴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규합총서』에는 장제조법뿐만 아니라 장담그는 데에 따른 택일법·금기사항·보관관리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장담그기 좋은 날은 병인일(丙寅日)·정묘일(丁卯日)·제길신일(諸吉神日)·정월우수일(正月雨水日)·입동일(立冬日)·황도일(黃道日)이다. 나쁜 날은 수흔일(水痕日)·육신일(六辛日)이라 하였다.

삼복일이나 해돋기 전에 또는 그믐날 얼굴을 북으로 두고 장을 담그거나 장독의 태세방향(太歲方向: 그 해의 간지 방향)으로 두면 벌레가 안 생긴다고 하였다. 또한, 여름에 비가 그친 직후의 우물물은 쓰지 말고 장담그고 세이레 안에는 아기 낳은 곳과 초상난 집에 가지 말고 낯선 잡인을 가까이하지 말라 하였다. 하루에 두 번씩 냉수로 장독을 깨끗이 씻으라고 하였다.

간장은 부종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기력을 유지하는 데 효과가 있다 하여 『구황촬요(救荒撮要)』·『구황절요(救荒切要)』 등 구황식품서에도 콩 대용으로 콩잎을 이용한 흉년기의 장제조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개화기 이후, 일본간장과 된장이 도입되었고, 간장제조회사가 1930년대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아서 각 가정에서는 여전히 우리의 재래식간장을 사용하였다. 그 뒤에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로 시판하는 간장을 사용하는 가정이 늘게 되어, 1980년 현재 공장 공급 비율이 전체소비량의 약 30%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조 방법

재래식 방법과 개량식 방법의 두 가지가 있다. 재래식은 가을에 콩으로 메주를 쑤어 온돌에서 띄운 다음에 이듬해 봄에 햇볕에 말린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볕이 잘 드는 곳에 30∼40일 가량 두어 충분히 우린 뒤에 그 즙액만 떠내어 체로 걸러서 솥에 붓고 달여서 만든다. 소금의 농도는 18∼20% 정도가 적당하다.

개량식은 황국균을 써서 만든 개량메주로 담그는 것이다. 재래식메주는 취급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세균과 곰팡이가 번식하므로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고 잘못 관리하면 좋지 않은 맛과 냄새가 날 수 있다. 개량메주는 단백질과 녹말을 가수분해시키는 힘이 강한 한 종류의 곰팡이를 번식시켜 만들므로 품질이 균일하고 감칠맛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맛은 너무 단순하여 집집마다 독특한 장맛을 지니던 때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재래식과 개량식 간장은 모두 양조간장으로, 제조하는 데 그 시일이 오래 걸리므로 공장에서는 아미노산간장을 제조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아미노산 간장은 콩가루·콩깻묵·땅콩깻묵·간장비지 등 단백질원료를 염산으로 가수분해하여 가성소다나 탄산소다로 중화시켜 얻은 아미노산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재래식 간장의 색·맛·향기를 내는 화학약품을 첨가하여 만든 것이다. 재래식 간장보다 제조시간이 단축되는 이로운 점은 있으나 풍미가 많이 떨어진다.

0.6∼0.9%의 질소, 20% 내외의 염분, 1% 내외의 당분과 10% 가량의 고형분을 함유한다. 아미노산의 분해산물인 멜라닌과 멜라노이딘 성분에 의해 간장은 갈색을 띤다. 그 고유의 맛은 β-메틸메르캅토프로필알콜에 의하여 생겨난다. 또한 간장 특유의 냄새는 알콜·알데히드·케톤·휘발성산·에스테르·페놀 등이 혼합되어 생긴 것이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불길한 일이 생길 징조라 하였다 그래서 장을 담그려면 우선 택일을 하고 고사를 지냈다. 장을 담글 때는 신일(辛日)을 기피했다. 이것은 신(辛)이 ‘신맛’과 음이 같으므로 장이 시어지는 것을 꺼리던 관념에서 나온 금기라 할 것이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정유재란 때에 어전회의에서 선조가 영변으로 피난 갈 것을 정하고 장을 준비하는 일에 신씨(申氏) 성을 가진 사람을 합장사(合醬史)로 파견하려 하자 신이라는 성은 장담그기를 꺼리는 날인 신일과 음이 같아 좋지 않다고 반대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신씨(申氏)나 신씨(辛氏) 가문에서는 성이 다른 사돈집에 가서 장을 담가 그 이튿날 옮겨오는 풍습이 있었고, 신씨의 이웃집에서는 신씨집 담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장독대를 설치하였다.

장을 담그는 주부는 사흘 동안 부정을 타서도 안되고, 외출도 안되고, 개를 꾸짖는 것도 금해야 했다. 심지어 여성의 음기(陰氣)가 간장에 닿지 않도록 입을 창호지로 봉하고 작업을 하였다. 장독에는 금줄을 치고 버선을 붙였다. 그것은 부정한 요소의 접근을 막거나, 혹은 부정한 요소가 버선 속으로 들어가 없어지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 주술적 의미로 고추나 숯을 장 위에 띄웠다. 그것은 살균과 흡착의 효과도 있었다.

가정의 일년사를 노래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중의 삼월령에는 “인간의 요긴한 일 장담는 정사로다/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고추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추하소.”라 하여 장담그는 일을 노래하고 있다. 유월령에서는 “장독을 살펴보아 제 맛을 잃지 말고/맑은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내어라/비오면 덮겠은즉 독전을 정히하소.”라 하여 장관리하는 일을, 십일월령에서는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쑬 일 남았도다/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라 하여 메주 띄우는 일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철따라 장 담그는 것을 주부의 가장 중요한 일로 알았으며, 그러한 정성을 다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맛이 생겨나고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시의전서(是議全書)』
『산림경제(山林經濟)』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규합총서(閨閤叢書)』
『고려이전 한국식생활사연구』(이성우, 향문사, 1978)
『한국식품사연구』(윤서석, 신광출판사, 1974)
『한국재래장류제조사』(장지현, 『민족문화연구』3, 고려대학교출판부,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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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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