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의 문인.
이칭
선행(善行)
청사(晴沙)
아호
서석(瑞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7년(선조 10)
사망 연도
1652년(효종 3)
본관
장흥(長興)
주요 저서
청사집(晴沙集)|정기록(正氣錄)
주요 관직
병조정랑
내용 요약

고용후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이고, 『청사집』과 『정기록』 등을 저술한 문인이다. 아버지와 두 명의 형이 모두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충신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한 이후 아버지와 형들의 충의를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의 문인.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이다. 형조좌랑을 역임한 고운(高雲)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역임한 고맹영(高孟英)이다.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 울산김씨(蔚山金氏)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큰형 고종후(高從厚)는 아버지 고경명이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이후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둘째 형 고인후(高因厚)는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첫째 부인 청해이씨(靑海李氏)는 이인기(李麟奇)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는 기홍헌(奇弘獻)의 딸이다.

주요 활동

1599년(선조 32) 순절한 부친과 두 형의 충절을 기록한 『정기록(正氣錄)』을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다음 해인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612년(광해군 4) 병조좌랑으로 재직하며 할아버지 고맹영의 주1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1615년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616년에는 『선조실록』의 편수에 참가하였다.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재직하던 1617년 아버지 고경명의 문집인 『제봉집(霽峯集)』을 간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는 고성군수(高城郡守)가 되었으나 주2의 집에 출입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주3되었다.

1630년(인조 8) 주4주5을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왔는데, 이때의 여정을 기록한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1631년 2월 조흥빈(趙興賓)의 고변에 연루되었을 당시에 시구(詩句)의 내용으로 죄를 받았지만, 충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용서를 받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7월 중국 사행 당시 주6을 남용한 일이 발각되어 서울로 잡혀와 국문을 당하고 진주(晉州)로 주9되었다. 이후 벼슬길이 막히자 세상에 뜻을 접고 광주(光州) 향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1680년(숙종 6) 아들 고부선(高傅善)이 아버지 고용후의 주7을 수집하고, 김수항(金壽恒)주8과 서문(序文)을 받아 문집 『 청사집(晴沙集)』을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청사집(晴沙集)』

단행본

『청사집(晴沙集)』 해제(한국문집총간 84, 한국고전번역원, 2006)
주석
주1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음.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3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4

조선시대에,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우리말샘

주5

‘사신 행차’를 줄여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6

국용(國用)에 부족한 인삼을 보충함. 또는 보충한 그 인삼.

주7

생전에 남긴 글.    우리말샘

주8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을 깎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함. 종이가 없던 옛날에 대나무 쪽 따위에 글씨를 써서 책을 만들었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말샘

주9

귀양살이하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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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세현(경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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