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풍속도는 근대 개항기의 화가 김준근이 그린 풍속화이다. 기산은 김준근의 호이다. 19세기말 부산·원산 등의 개항장에서 주로 서양인들에게 판매했다. 한국은 물론 독일·프랑스·영국·덴마크·네덜란드·오스트리아·러시아·미국·캐나다·일본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에 1500여 점이 전한다. 김준근이 다룬 주제 중 형벌·제례·장례 장면은 이전의 풍속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들로, 서양인에게 조선의 풍속을 이해시키기 위한 의도가 잘 드러난다. 표정 없는 얼굴, 행위나 물건에 집중되는 구도도 인물보다는 행위나 물건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기산(箕山) 김준근이 19세기 말 부산 · 원산 등의 개항장에서 주로 서양인들에게 판매한 풍속화이다. 그의 풍속화는 한국은 물론 독일 · 프랑스 · 영국 · 덴마크 · 네덜란드 · 오스트리아 · 러시아 · 미국 · 캐나다 · 일본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에 1500여 점이 전한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사용되면서, 김준근은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널리 알린 화가가 되었다. 김준근의 풍속화, 즉 기산 풍속도는 주로 낱장 형태의 채색화로 그려져 서양인들이 수십 장씩 한꺼번에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많지는 않지만 화첩 형식도 국내에 전해진다.
김준근의 그림은 현재 1500여 점이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대략 1880∼1890년의 약 10여 년 동안 제작된 것들이다. 먼저 시기가 가장 올라가는 그림은 베를린 민족학박물관(Ethnographic Museum)의 소장품이다. 이는 묄렌도르프(P. G. von Mölendorff, 18471901)가 1882년에서 1885년까지 조선에 거주하는 동안 수집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11895)의 딸인 메리 슈펠트가 1886년에 수집한 미국 스미스소니언기록보관소(Smithsonian Institution Archives)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인류고고학박물관(Museum of Archaeology and Anthropology)의 그림이 있다. 슈펠트의 수집품에 대해서는 1895년에 출판된 컬린(Stewart Culin, 1858~1929)의 저서 『한국의 놀이(Korean Games)』 서문에 1886년 ‘기산’이 그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8881889년에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의 수집품인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Guimet National Museum of Asian Arts) 소장품이 있다. 그리고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 라인(J. Rhein)이 1889년 이전에 수집한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민족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Ethnology)의 소장품이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수집한 것으로 보이는, 제물포 세창양행(世昌洋行) 경영자 마이어(H. C. Eduard Meyer, 1841~1926)의 소장품이 있다. 이 그림들은 1894년 함부르크 민속공예박물관에서 전시된 이후 마이어의 기증으로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Musuem of Ethnology)에 소장된 것으로 보인다.
기산 풍속도는 대체로 그림, 그림 제목[畵題], 그리고 관서(款書)와 인장(印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속 장면이 중앙에 그려지고 그림 제목은 한글 또는 한자로 오른쪽 상단에 쓰여 그림을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자를 알 수 있게 하는 ‘기산(箕山)’이라는 호인(號印)이나 ‘김준근인(金俊根印)’이라는 성명인(姓名印)이 찍히고 간혹 제작지를 알려주는 관서가 쓰이기도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처럼 화첩으로 묶여 있는 경우에는 맨 끝 장면에 관서, 호인, 성명인이 찍히지만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이나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본같이 낱장이 세트를 이룬 경우는 매 장마다 호인이 찍혀 있다. 이는 김준근의 그림들이 화첩으로 묶여 판매되기도 하고 낱장으로도 팔린 상황을 짐작케 한다.
김준근 풍속화에는 두 종류의 인장, 두 종류 이상의 글씨체, 다양한 양식의 인물 표현 등이 나타나, 김준근이 한 명 이상의 화가들을 지휘하여 공동 제작 방식으로 작업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공동 제작 방식은 18, 19세기에 제작되어 서양인들에게 대량 판매된 중국의 ‘수출화[또는 외소화(外銷畵)]’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수출화의 특징은 김준근 풍속화의 소재나 주제 면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관혼상제 · 직업 · 놀이 · 신앙 등 다양한 주제 중 형벌 · 제례 · 장례 장면은 김준근 풍속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것들이다. 즉 조선인이라면 이 장면들을 감상하거나 즐기기 위해 찾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풍속에 낯선 외국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양인들의 수요로 제작되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또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에 중점을 둔 18세기 김홍도, 신윤복 등의 작품 양식과 비교해 볼 때, 김준근의 그림은 표정 없는 얼굴, 행위나 물건에 집중되는 구도 등에서 인물 자체보다는 행위나 물건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 준다. 즉 한글이나 한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다양한 풍속을 시각적으로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린 결과, 김준근의 풍속화는 서양인에게 일종의 인물 풍속에 관한 백과전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 서양화법과 색채 사용 면에서는 깊이감이 진전된 원근법이라든가 값싼 서양 안료의 사용 등 19세기라는 시대성을 잘 드러내 준다.
김준근 풍속화는 19세기 말 예술의 생산체제와 문화 환경을 반영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개발과 조선 풍속화의 향유층을 국외로까지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