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산(安山). 일명 명국(鳴國).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으로 교수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647년 창경궁 중수 공사 때는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데리고 책임 화원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1651년에는 한시각(韓時覺) 등과 함께 현종명성후(顯宗明聖后)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내교(鄭來僑)의 『완암집(浣巖集)』에 의하면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취한 뒤에 그려진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기질은 힘차고도 자유분방한 필치로 처리된 그의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유작들은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것도 있으나 대부분 절파[浙派: 중국 명대 절강(浙江)지역의 대진(戴進)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화파] 후기의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 거칠고 농담의 대비가 강렬한 필묵법을 사용해서 그린 그림의 경향) 화풍의 작품들이다. 즉 굳세고도 몹시 거친 필치와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하게 가해진 준찰(皴擦),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화풍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관폭도(觀瀑圖)」·「투기도(鬪碁圖)」 등의 작품들에서도 얼마간의 차이를 드러내며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조선 중기를 풍미했던 절파화풍도 그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였다.
그는 절파풍의 산수 인물화 이외에도 대담하고 힘찬 감필(減筆)로 처리된 선종화를 잘 그렸다. 「달마도(達磨圖)」·「은사도(隱士圖)」·「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 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선종화들은 한두 번의 간결한 붓질로 대상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표출하면서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선종화에서 내보이는 필치는 그의 산수 인물화풍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그를 우리 나라 화가 중 제일 거칠고 호방한 필법을 구사했던 인물로 손꼽히게 한다.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대표적 인물로는 조세걸(曺世杰)이 있으나 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