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초(東超) 김연수는 1907년 3월 10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김병옥(金柄玉)과 박득복(朴得卜) 사이,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득복은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거금도)에서 무업에 종사한 세습 무당이었다.
김연수는 고향인 고흥 지역에서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하고, 21세 되던 1927년 판소리에 입문하여 고흥 신청 출신 명고수인 오성삼에게 소리와 장단을 두루 배웠다. 29세 되는 1935년부터 고향을 떠나 당대 명창들을 두루 사사하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익혔다,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송만갑에게서 「흥보가」와 「심청가」를, 정정렬에게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웠고, 정응민에게서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수는 1936년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의 전막 창극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흥보전」과 「심청전」에서 호방 역이나 동리 사람 역을 맡았다. 중일 전쟁 이후 전시체제가 구축되던 1938년에 「토끼타령」과 「옹고집」에서 자라 역이나 옹고집 역 등 주역을 맡았고, 조선성악연구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일제의 통제와 동원이 확대되던 시기, 창극좌(1941)와 조선창극단(1942), 조선이동창극단(1944)을 주도하며 경향 각지에서 창극 순회 공연을 했고, 「장화홍련전」(박진 각색, 1943) 등 신작 창극 출현에 기여했다.
김연수는 해방 후 김연수창극단(1946), 한일창극단(1949), 우리국악단(1950)을 창단해 대구 · 부산 지역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추련송」(1948), 「단종과 사육신」(1949), 「평화의 쇠북소리」(1953) 등 신작 창극 대부분의 각색과 작창을 담당했다. 1957년 5월 대한국악원 원장으로 취임해 한 차례 연임했고, 1962년 2월 국립국극단 초대 단장에 취임하여 1974년 3월 작고할 때까지 재임하며 창극 대본 창작과 각색, 작창과 연출 등을 맡았고, 장단과 발음, 너름새를 다듬어 시청각적 전달력을 높였다.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현, 무형문화유산) 제5호 판소리 예능 보유자가 되었다.
김연수는 일제강점기에 유성기 음반을 녹음하고 경성방송국 국악 방송에 출연했다. 1938~1939 빅타레코드사에서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의 주요 대목을 녹음했고, 1942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창작 판소리 「장끼전」과 남도가요 「아우를 생각고」를 녹음했고, 「창극심청전전집」을 각색 · 녹음했다.
김연수는 1960년 전후 자신이 새로 짠 판소리 다섯 바탕을 정리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 동초제는 여러 유파의 소리를 집대성하고 신재효 사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장면과 배역에 맞는 소리와 잘 짜인 구조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동아방송국(DBS)에서 ‘김연수 창 연속판소리 다섯 바탕’이 138회에 걸쳐 연속 방송되었다. 1967년 국악예술학교 출판부에서 『창본 춘향가』가 간행되고, 1968년에는 김연수가 도창을 한 LP음반 창극 「대춘향전」이 지구레코드공사에서 발매되었다. 타계 직후인 1974년 7월 문화재관리국은 『창본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