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은 고려후기 삼척지군사, 밀직부사, 지문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54년(공민왕 3)에 태어나 1398년(태조 7)에 사망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 일파의 중심 인물로서 구세력과 대립했다. 위화도회군을 진언하고 이성계 왕위 추대에 참여했고, 새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 터 등을 정했다. 정조사의 표문이 명 태조의 비위를 거슬러 글을 초안한 정도전을 명으로 압송하라는 압력을 가해오자 정도전과 함께 요동정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태조를 도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했다가 정도전과 함께 살해당했다.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 어머니는 참의 최강(崔茳)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 남재(南在), 아우는 우상절도사(右廂節度使) 남지(南贄)이다.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급제, 1380년(우왕 6)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고 이어서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가 되어 왜구를 격퇴, 사복시정에 올랐다.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구 세력과 대립했으며,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가담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했으며, 조인옥(趙仁沃) 등과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했고, 회군 뒤 이성계의 왕위 추대 계획에 참여했다.
1389년(공양왕 1) 응양군상호군 겸 군부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로 승진했다. 1391년 정몽주(鄭夢周)에 의해 조준(趙浚) · 윤소종(尹紹宗) · 조박(趙璞) · 정도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다.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정도전 · 조준 · 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웠다. 조선 건국 뒤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책록,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으며, 전(田) 200결과 노비 25구를 하사받았다.
1393년(태조 2) 경상도에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고 군적(軍籍)을 새로이 작성했으며,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가 되어 새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 터 등을 정했다. 1395년 부친상을 당했으나, 형인 남재와 함께 기복(起復)되어 이듬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때 정조사(正朝使)의 표문(表文)이 명나라 태조의 비위를 거슬러 사신 정총(鄭摠)이 살해되고 글의 초안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라는 압력이 가해 왔다. 이에 정도전과 은밀히 의논, 군량을 비축하고 진도(陣圖)를 작성하는 등 요동 정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태조를 도와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했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 심효생(沈孝生) 및 아우 남지와 함께 살해당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1421년(세종 3)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강무(剛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