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응선생 묘 일원 ( )

고려시대사
유적
문화재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도응의 무덤.
이칭
약칭
도응선생묘역
유적/고인돌·고분·능묘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고려|조선
관련 단체
성주 도씨 청송당 종중
관련 인물
도응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 외 2필 (지석리)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시도기념물(1993년 11월 12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 외 2필 (지석리)
내용 요약

도응선생 묘 일원은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도응의 무덤이다. 도응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를 지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현재 충청남도 홍성)에 은거하였다. 죽미지우였던 조선 태조가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 묻혔다. 고려 말 충신 도응의 생애와 충절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도응의 무덤.
건립경위

도응(道膺)은 고려 말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조선 태조의 죽마지우(竹馬之友)이자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산 지역 성주 도씨(星州道氏)의 입향조(入鄕祖)이기도 하다. 도응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데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냈으나 조선이 세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노은동(老隱洞)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친구와의 옛정을 생각해 벼슬을 내리고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는 도응의 충절과 절의에 찬탄하여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묘역은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던 홍주 노은동과 이웃한 곳이다.

형태와 특징

도응선생의 묘역은 충청남도 에산군 응봉면 매봉산(173.2m) 기슭의 낮은 구릉 사면에 동향으로 자리한다. 묘역은 왕릉의 사초지(莎草地)처럼 경사진 언덕 위에 조성되었다. 봉분은 묘역 정상에 위치하며 도응의 처 단양 우씨(丹陽禹氏)의 묘와 함께 쌍분을 이룬다. 원형의 봉분에는 별다른 시설물은 없으며 뒤편으로 꼬리[龍尾]가 이어져 주4과 연결된 모습이다. 2개의 봉분 사이 전면에 묘비와 상석, 혼유석이 배치되었다. 봉분 전면에는 1단의 주1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아래로 전면 왼쪽에는 비석 1기가 세워져 있고 양쪽에 주2망주석이 각각 1기씩 배치되어 있다. 석물 사이에는 장명등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과 사성 등 묘역은 정비된 것이며 석물도 대부분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묘역 아래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 2기와 재실인 경충재(景忠齋)가 건립되어 있다. 도응 묘역 인근 산줄기에는 손자인 도순손(都順孫) 부부의 무덤이 있다.

금석문

1993년 묘역 정비가 이루어졌을 당시 땅속에서 높이 88㎝, 폭 37㎝, 폭 16㎝ 크기의 묘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앞면에 ‘고려국중대광문하찬성사성주도공휘응지묘(高麗國重大匡門下贊成事星州都公諱膺之墓)’ 측면에 ‘병오팔월일재중수(丙午八月日再重修)‘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정확한 중수 시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묘역 아래 정면 왼쪽의 신도비는 도응선생의 14세손 병택(秉澤)이 전(篆)을 하고 풍천(豊川) 임영호(任英鎬)가 쓴 것으로 도응과 성주 도씨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정면 오른쪽 신도비(1991년 건립)는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 청송당성주도공휘응신도비(中大匡門下侍中贊成事靑松堂星州都公諱應神道碑)’라 새겨져 있다.

현황

도응선생 묘역은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에 있다. 1993년 11월 12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성주 도씨 청송당 주5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응과 관련한 자료로 1393년(태조 2)~1397년(태조 6) 동안 태조가 도응에게 하사한 사령 주3 4매와 녹패(祿牌) 등 5매의 ‘성주 도씨 종중 문서 일괄’이 전해진다.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4호로 지정된 이 문서는 도응의 생애와 조선 전기 관제와 주6의 변천 과정 등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의의 및 평가

묘역의 구조와 석물은 후대에 정비되어 본래의 모습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말 문신 도응 선생의 충절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문화유적분포지도』 (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2001)
『예산군지』 (예산군지편찬위원회, 2001)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디지털예산문화대전(http://yesan.grandculture.net/yesan)
주석
주1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2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3

조선 초기에, 임금이 사품 이상의 문무관 벼슬아치에게 주던 사령(辭令). 세종 7년(1425)에 교지(敎旨)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4

풍수지리에서, 묏자리의 뒤에 작은 맥이 혈의 가를 에워싼 두둑. 우리말샘

주5

성(姓)이 같고 본(本)이 같은 한 겨레붙이의 문중. 우리말샘

주6

옥새와 옥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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