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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

    근대사사건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의 자기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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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의 자기해방운동.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무정부주의 운동은 인류 역사를 일관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의 전통 속에서 하나의 자각된 이론으로 성숙한 것은 조선시대의 서경덕(徐敬德)에서 찾을 수 있다. 서경덕은 송나라 주희(朱熹)의 주리설(主理說)에 주기설(主氣說)로써 대립하였다.
    주희의 주리설은 이상기하(理上氣下) 이주기종(理主氣從)의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다. 이에 대해 서경덕은 “기의 밖에 따로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라는 것은 기 가운데 있는 자기통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통제한다 함은 밖으로부터 와서 이를 주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의 작용이 스스로 능히 그러함의 똑바른 것을 잃지 않음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기는 운동력이요, 생산력이다. 기는 자기의 운동법칙을 자기 스스로의 속에 포함한다. 이 말을 인간 사회로 옮겨놓으면,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한 생산 활동의 자율적 통제, 즉 자주관리(自主管理)를 의미한다. 이 밖에 백성 위에서 백성을 지배하는 계층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경덕의 철학적 주기설을 사회·경제 정책으로 구체화한 것이 정약용(丁若鏞)의 여전제(閭田制)이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하는 자는 토지를 얻고 농사를 하지 않는 자는 토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자는 상업이나 공업을, 혹은 농사 시험이나 농공업 또는 교육에 종사할 수 있도록 직업 선택의 여지를 두었다. 그러고 원칙적으로 놀고 먹는 착취계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구 밀도 및 토지 생산력의 차이로 인해 여(閭) 상호간에 빈부격차가 있는 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이 문제가 사람들의 자유로운 전출과 전입으로 자연히 조절될 것으로 보아 “백성이 이로운 것에 따르는 것은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경작지는 많은데 일손이 모자라거나 경작지는 적은데 주민이 너무 많거나 하면,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이 행정적 강제가 없어도 전출입이 이루어져 인구 밀도는 저절로 고르게 조절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여기에 일체의 독점적 소유와 강제적 권력을 배제했다. 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한 직업의 선택, 그리고 거주와 여행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전형적 표현이었다. 이 제도는 현대 산업사회에 더욱 적절히 적용될 것이다. 대규모의 생산시설이야말로 일련의 공동 작업과 공동 관리를 불가피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이념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 1894년의 농민혁명이다. 최제우(崔濟愚)의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人乃天 事人如天).”는 이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반상(班常)·적서(嫡庶)·노주(奴主)·빈부(貧富) 등 일체의 차별이 용납될 수 없다. 농민군이 표방한 “보국안민 광제창생(輔國安民 廣濟蒼生)”은 곧 반봉건·반강권(反强權)·반착취의 선언이었다.
    1894년 4월 전봉준(全琫準)의 창의문(倡義文)에서는 “공경(公卿) 이하 방백(方伯)·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급은 개의치 않고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윤태(潤態)에만 혈안이 되어 과거(科擧)의 문은 돈벌이의 길로 통하고 응시의 마당은 교역의 시장으로 변하였다.……나라의 누적된 빚은 아랑곳없이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작태로 쉴 날이 없으니, 팔로(八路)의 백성은 고기밥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우리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遺民)이라 할지라도 토지를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인지라 나라의 위망(危亡)을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 팔로가 마음을 함께하여 백성의 뜻을 모아 지금 여기에 보국안민의 의기(義旗)를 올려 생과 사를 맹세하노라.” 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나라 2,000년 역사를,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가해지는, 왕권으로 대표되는 토지지배층의 수탈관계라는 관점에서 개관해볼 수 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몇 번의 왕조 교체는 단지 토지 지배층의 재편성을 의미하였을 뿐, 수탈관계 자체에는 아무런 본질적 변동이 없었다.
    이 사실을 고발한 것이 서경덕의 주기설과 정약용의 여전제요, 갑오농민군의 의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노쇠하고 부패한 지배층은 농민의 혁명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타민족의 침략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색다른 지배자 아래 다시 반세기의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으로부터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해 점차 국내로 스며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렬(朴烈) 등의 세칭 ‘대역사건(大逆事件)주 01)’으로써 우리 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막이 열렸다.
    1910년대의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직후 자본주의 열강의 침식이 계속되었다. 이 난국은 민족의 단결,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근대화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서세동침(西勢東侵)을 막아 한족(漢族)의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염원으로 나타났다.
    중국 무정부주의자들도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만 이 과업 수행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우리 나라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이러한 공통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이 공통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었다.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1900년대에 일본은 이미 약 반세기의 근대 화과업을 성취하고, 청일전쟁(1894)·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한 후에는 점차 제국주의의 단계로 넘어가 자본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내의 우리 무정부주의 운동은 저절로 민족해방전선을 계급해방투쟁에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중국 내의 우리 무정부주의 운동은 계급해방전선보다 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통일공동전선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후자가 민족주의적 색채를 짙게 하고 있었음에 비해, 전자가 일본의 노동운동과 결속하여 현저히 좌경화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정세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국내운동의 성격은 해외에서 성장한 두 조류가 흘러 들어와 서로 합류하는 데서 규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민족해방전선과 계급해방전선이 상호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약 반세기간의 우리 나라 무정부주의 운동은 1945년 8월을 고비로 양분되어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즉, 민족항일기에는 시종일관 반제(反帝)·반군국(反軍國)·반강권·반정부·반국가의 전면적 저항과 파괴를 강행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저항의 대상이요, 파괴의 목표였던 일제가 패퇴한 1945년 8월 이후에는 우리 나라 무정부주의자들은 새 나라의 건설에 어떻게 무정부주의를 적용할 것이냐 하는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만주로 탈출한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만주에 이주한 동포들을 모아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가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주 02)를 세워 둔전양병(屯田養兵)을 꾀하고 있었다.
    이회영은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국경을 넘나들면서 국치 후 10년동안 인심 세태의 변천을 경험하였다. 이회영은 세태가 변했기 때문에 운동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질적인 파벌싸움을 지양하고 일치단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4월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하였다. 이회영은 운동의 구심점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정부 형태로 만드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필요한 조직은 행정체제로서의 정부가 아니라, 각 계열의 각 파가 협력할 수 있는 연합기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부를 조직하면 잠정적 임시정부라 할지라도 자리 다툼과 세력 싸움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적잖은 지장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 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를 만드는 데로 대세가 기울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회영은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는 인민에게 평등한 의식주를 보장해준다지만,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런 식의 평등한 생활은 실상 일일삼식을 고루 나누어주는 감옥생활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물론 평등해야 하겠으나, 그런 위에 다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라 하건 혁명운동이라 하건 이 조건을 결(缺)한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이회영과 신채호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회영이 신채호·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巖) 등과 민족의 자주독립과 새나라 건설에 대한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한 사회가 장차 세워져야 할 조선의 이상적 모습으로 뚜렷이 인식하였다.
    이 때 백정기(白貞基)도 일본을 거쳐서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1923년 4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백정기 등은 1924년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정의공보 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 신채호는 중국 및 대만동지들과 협력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1929년 7월 난징(南京)에서 조선·중국·필리핀·일본·대만·안남(安南) 등 각국 무정부주의 대표자들에 의해 동방무정부주의연맹으로 확대되어 기관지로서 《동방 東方》을 발행하였다.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김종진(金宗鎭)은 스터우허쯔(石頭河子)의 김야봉(金野蓬), 산시(山市)의 이달(李達)과 이덕재(李德載), 하이린(海林)의 이붕해(李鵬海)와 엄형순(嚴亨淳), 신안전(新安鎭)의 이준근(李俊根), 미산(密山)의 이강훈(李康勳)과 김야운(金野雲) 등과 더불어 1929년 7월하이린소학교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위원장 김종진이 신민부 대표 김좌진(金佐鎭)과 협의한 결과 신민부를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김좌진이 “우리(신민부)와 그들(연맹)이 표리가 되고 이신동체(異身同體)가 되어…… 교육과 사상지도 및 생활개선은 연맹에서 맡도록 하고 개편되는 총연합회에는 그들 전원이 참가하도록 하자.”고 제의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두 단체의 합작이 이루어졌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대강(組織大綱)을 보면, 의결기관이 있고 집행부가 있어 그것은 일종의 정부였다. 그러나 타민족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정부도 아니고, 전자본을 국유화하여 관료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공산당식의 국가자본주의적 정부도 아니다.
    이 정부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들 자신의’ 무강제(無强制)·무지배·무착취를 보장하는 무정부라고 할 수 있었다. ‘무정부’라는 역설적 표현보다 차라리 인민의 자치기관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족총연합회 조직은 재만교포들의 환영리에 급속도로 확대되어 예기한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살길을 찾아 이주한 백만 동포가 있고, 식민지통치의 직접적 지배를 벗어난 신천지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갑오농민혁명의 해외판 부활이라고 할 수 있고, 무정부주의 사회의 실현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다시 한번 입증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만주에서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이회영에 의해 착수되고 끝을 맺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라는 전투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연맹은 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 섬멸작전이 임무였다. 1937년 10월 중일전쟁 때는 두 개의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 활동하였다.
    하나는 정화암·유기석·유자명·이강(李剛) 등에 의하여 학도병 귀순공작과 포로구출작전을 담당하였다. 다른 하나는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김동수(金東洙)·이재현(李在賢) 기타 대원으로 구성되어 실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 후자는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1940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진 뒤 1942년 10월 유자명과 유림(柳林)이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유자명은 제1분과(법제·청원·징계)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유림은 1934년 10월 제35차 의회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 개정안 작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9월 동경에서 박렬 등의 불령사(不逞社)의 세칭 대역사건에 관련된 홍진유(洪鎭裕)·서상경(徐相庚) 등이 예심에서 석방된 뒤 귀국하였다. 1924년 12월부터 흑기연맹(黑旗聯盟)의 조직을 추진하다가 이듬 해 5월 초 일제히 검거되었다.
    1925년 9월대구에서도 진우연맹(眞友聯盟)이라는 무정부주의자 비밀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도 역시 불령 대역사건 관련자 서동성(徐東星)이 창립맹원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또, 창립맹원 방한상(方漢相)은 그 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 수감 중인 박렬과 가네코(金子文子)를 위문차 방문하고 귀국 후 구호금을 모금해 송금하였다.
    이런 일들이 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여 1926년 진우연맹 맹원들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같은 해 1월 허무당선언(虛無黨宣言)이 서울 시내에 배포되었다. 이 밖에도 1927년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리에서 김호구(金豪九)를 중심으로 흑전사(黑戰社)가 조직되었다.
    1929년강원도 이천에서 이은송(李殷松)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청년이 비밀결사인 이천자유회(伊川自由會)를 조직하였다. 특히, 이천자유회는 단순한 사상적 계몽운동을 벗어나 대중의 조직적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5월 초부터 충청남북도 전역에 걸쳐서 일대 수사망을 펼친 경찰은 충주문예운동사(忠州文藝運動社)의 사원들을 검거해, 6월 8일 전원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하였고, 1930년 3월 5일 제1차공판이 열렸다. 사원들은 문예운동사는 순전히 문예운동단체라고 주장했으나, 검사는 무정부주의 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라면서 치안유지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 검사는 그들의 구형을 정당화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문예운동사는 피고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형식상 결코 비밀결사일 수 없었고, 순전히 문예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정부주의적 문예창작과 이론을 위한 기관지 운영에 있었고, 장차 국체의 변혁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문예운동사를 탄압했던 것이다.
    한편, 무정부주의 운동의 자금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신현상(申鉉商)은 미곡상 최석영(崔錫榮)이 거래처인 호서은행에 상당한 신용이 있다는 데 착안하고, 1930년 2월 양곡거래조건으로 호서은행 본지점에서 15회에 걸쳐 5만 8000원을 인출하였다.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같은 해 5월 1일 톈진(天津)에서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유기석(柳基石)과 이회영이 백방으로 뛰어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전원이 석방되었으나, 두 사람은 남은 돈과 함께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제주도에서도 무정부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7년 3월고병희(高秉禧)는 조대수(趙大秀)·강기찬(康箕贊)·김형수(金炯洙) 등과 우리계(宇利稧)를 조직하였다.
    제주도의 젊은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제약의 범위 내에서나마 우리 나라 전통의 습속을 살려 최대한의 상호부조적 자유사회를 실현해보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우리계를 조직했는데 비밀결사도 아니었고, 혁명을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계원들은 경찰관을 제외한 도청·은행·금융조합·학교 등의 공무원과 각종 실업가 기타 도민 유지들이 제주도 일원의 12포(浦) 별로 총망라되어 있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65명을 검거할 계획이었으나 사건을 축소해 15명을 검거하고 고병희 외 5명을 주모자로 기소하였다. 이 조직은 국체의 변혁을 계획한 음모 조직도 아니고 사유재산제도의 전복을 획책한 혁명 조직도 아니었다. 계원들은 다만 식민지통치의 제약 하에서나마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유연합적 상호부조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관서·관북 지방에서도 1926년 이래 원산청년회, 원산본능아연맹(本能兒聯盟), 원산 일반노조, 평양·안주·철산·단천 등 각 지방에서 흑우회(黑友會)가 조직되고 있었다. 평양의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는 1929년 8월 8일 임시총회를 열고,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11월 10·11일 이틀간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회일자가 가까워지자 평양경찰서는 집회 금지를 통고했다. 각지에서 평양으로 온 동지들의 기대가 컸으나 일본 경찰의 체포·구금·추방 등 극심한 탄압으로 대표자들은 대면조차 못한 채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전열을 다시 정비해 같은 해 11월 10일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그러나 1931년 4월 조직이 탄로되어 연맹원 최갑룡(崔甲龍)·조중복(趙重福)·이홍근(李弘根)·임중학(林仲鶴)·강창기(姜昌磯)·안봉연(安鳳淵)·유화영(柳華永)이 잡혔으며, 김대관(金大觀)은 원산청년회사건으로 이미 구속 중이었다.
    박렬·정태성(鄭泰成)·김중한(金重漢)·홍진유·최규종(崔圭淙) 등이 불령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불령선인 不逞鮮人》을 발행하였다. 이 모임에는 일본인 구리하라(栗原一男)·노구치(野口品二)·오가와(小川茂)·가네코·아라야마(新山初代) 등이 가담하고 있었다.
    1923년 9월의 동경대지진 당시 이들은 전원 세칭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었다. 박렬과 가네코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렬은 22년 뒤 1945년 10월 맥아더사령부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가네코의 옥중 변사는 한때 일본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밖에 동경과 대판(大阪)을 중심으로 흑우연맹·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 기타 각종 무정부주의 단체가 조직되었으며, 《흑색신문 黑色新聞》·《자유코뮨》·《토민 土民》 등이 창간·발매금지·폐간·복간·재발간을 되풀이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일본 천황 폭살미수사건
    주02
    신흥무관학교 전신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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