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로 인해 일어났기 때문에 사옥(史獄)이라고 한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이 춘추관에서『세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의 원고가 될 사관(史官)의 사초를 거두어들였다.
이때 사초에 본관의 이름을 쓰게 된다는 말을 듣고 사초를 작성한 바 있는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민수는 사초에 쓴 바른 말이 문제가 되어 대신들에게 원망을 받을까 두려워 하였다. 이에 몰래 봉교(奉敎) 이인석(李仁錫)과 첨정 최명손(崔命孫)에게 청해 자신이 쓴 사초를 빼내어 고치고자 했다. 그러나 사초를 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기사관(記事官) 강치성(康致誠)에게 간청해 사초를 빼내어 고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바쁘게 고쳐 정서하지 못하고 되돌려주게 되었다.
이 때 검열(檢閱) 양수사(楊守泗)와 최철관(崔哲寬)이 민수의 사초에 글씨를 지우고 새로 고친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참의 이영은(李永垠)에게 알리자, 이영은은 이 사실을 여러 당상관에게 폭로하였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되고, 부정(副正) 김계창(金季昌)이 정언(正言) 원숙강(元叔康)도 사초를 많이 고쳐 썼다고 임금에게 고하자, 모두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임금의 친국에서 민수는 모든 사실을 시인하고 “목숨만 잇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간청해 곤장만 맞고 제주로 보내어져 관노(官奴)가 되었다.
강치성은 처음에 사실을 부인하다가 고문 끝에 사실을 자백해 원숙강과 같이 참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인석·최명손은 이 사실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곤장 100대를 맞고 본관지(本貫地)의 군역에 편입되었다. 이 사건 후 이러한 사옥을 막기 위해 사초에 본관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옛 제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