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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렴(裵濂)

회화인물

 해방 이후 「생신」·「춘경산수」·「강촌」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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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생신」·「춘경산수」·「강촌」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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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제당(霽堂). 경상북도 금능(현 김천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24년금릉청년학관 중등과에 입학하여 2년의 신학(新學) 과정를 수료하고 1928년 서울로 올라와 이상범(李象範)의 청전화숙(靑田畵塾)에서 전통 화법을 공부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929년 제9회 서화협회전람회(書畵協會展覽會)에 처음으로 「만추(晩秋)」를 출품한 뒤 1936년 서화협회의 마지막 전람회까지 해마다 출품하였다. 1930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도 출품하여 입선을 거듭하고, 1936년과 1943년에는 「요원(遼遠)」과 「산전(山田)」이 특선에 올랐다. 이 시기의 전람회 출품작들은 전적으로 스승인 이상범의 작풍(作風)과 화의(畵意)를 본받은 수묵 담채(水墨淡彩)주 01)로 향토적 풍경을 주로 묘사한 것들이었다.
1939년에는 청전화숙을 나와 금강산 일대를 답사한 뒤 이듬해 서울의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이때부터 이상범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화풍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는 청전화숙(靑田畵塾) 동문전에 참가했다.
광복 직후 창설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이응로(李應魯), 장우성(張遇聖), 이유태(李惟台), 조중현(趙重顯) 등과 전통 회화의 새로운 진로를 연다는 의욕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46년 3월에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그때 그의 출품작은 새로운 역사의 출범을 상징한 「생신(生新)」이었다.
1947년에 미군정청 문교부가 전국종합미술전을 열 때 심사위원을 지냈다. 194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가 창설되자 추천 작가·초대 작가로 참가하였다. 1953년부터 1967년까지는 계속 국전 동양화부 심사 위원을 역임하며 화단에 영향력을 미쳤다. 1954년에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중년 이후의 작품은 온화하고 유연한 필치로 전통적 화격(畵格)을 실현시킨 독자적인 산수화와 화조화에 집중되었다. 1964년부터 홍익대학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63년에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신세계 화랑에서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제당 배렴화집  (동아일보사, 1978)

  • 『한국현대미술사-동양화-』(이구열,국립현대미술관,1976)

  • 제당 배렴의 실경산수화 연구  (구혜경,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 「수묵에 묻힌 인생-제당 배렴-」(이경성,『근대한국미술가논고』,일지사,1974)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빛이 엷은 먹물과 엷은 채색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이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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