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중한(仲閑). 아버지는 선무원종2등공신 배덕문(裵德文)이다.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급제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첨사·진주목사·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배설은 웅천을 급습해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상실하였다. 칠천해전(漆川海戰)의 초반전인 14, 15일 싸움에서 패한 뒤,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배설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7월 16일 적의 대선단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여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이순신(李舜臣)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으나,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도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전국에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종적을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權慄)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되고 아버지와 아들 배상충(裵尙忠) 등은 모두 방면되었다.
그 뒤 쌓은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증손 배석휘(裵碩徽)가 지은 『가범(家範)』에 시조 2수가 전하는데, 선조 때의 시조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조선 시조문학사상 그 의의가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