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정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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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부근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선과 청국 사이에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정계비.
내용 요약

백두산정계비는 조선후기 조선과 청국 사이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백두산 부근에 세운 정계비이다. 청나라는 건국 이후 간도지역을 자국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사람의 이주를 금하였다. 이후 불모지로 방치되어 국경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충돌이 잦아져 외교문제화하였다. 이에 양국은 1711년 국경 확정을 논의하고 정계비를 세웠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국경 문제가 다시 외교적 현안이 되었으나, 일본이 간도협약에서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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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백두산 부근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선과 청국 사이에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정계비.
내용

당시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 ·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 사이에 자주 분쟁 사건이 일어났다. 거의 빈땅으로 되어 있던 이 지역에 인삼을 캐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왕하며 때로 충돌을 일으켜서 말썽이 되었다.

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외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 · 압록강 건너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이에 1711년에는 목극등이 압록강 대안 현지에 와서 조선의 참핵사(參覈使)와 함께 범법 월경 현장을 검핵(檢覈)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범법 월경 사건들을 문제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도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그 해 2월, 목극등을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査定)하려 하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어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頭道溝)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厚州)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 정부에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해 5월 15일 백두산 천지(天池)가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 지점인 2,200m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애초 국경 사정(査定) 문제가 일어날 때, 조선 정부의 의견은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경을 사정하는 임무를 띠고 나아갔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한 몸으로 험한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여 중간에서 뒤떨어졌다.

조선 관원으로는 접반사 군관 이의복(李義復), 순찰사 군관 조태상(趙台相), 거산(居山) 찰방(察訪) 허량(許樑), 나난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 역관(譯官) 김응헌(金應瀗) · 김경문(金慶門) 등 6인만이 동행하였다. 따라서 모든 것은 청나라의 파견관 대표인 목극등의 의사대로 진행되었다.

결국 목극등이 애초 의도한 대로,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물이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분수령 위의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 같은 바위를 그대로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높이 약67㎝, 폭 약45㎝ 정도의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 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어 청국인 수행원으로 필첩식(筆貼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를 적고 아래에 조선 관원 6인의 이름도 함께 새겼다.

비를 세운 후 일행은 다시 지세를 살피며 무산으로 내려가서 각기 헤어졌다. 이때 목극등은 다시 조선관원들에게 "토문강의 수원이 되는 물길이 중간에 땅속으로 들어가서 경계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는 여기저기에 돌 또는 흙으로 돈대(墩臺)를 쌓아 아래쪽 강물까지 연결해 범법 월경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부탁하였다. 한 · 중 두 나라의 경계선이 비로소 그어진 셈이다.

그 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을 보내어 간도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러자 1883년 조선 측은 어윤중(魚允中) · 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9월에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으나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해 남만주의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이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에 없어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통문관지(通文館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유하집(柳下集)』
『白頭山定界碑』(篠田治策, 樂浪書院, 1938)
「조·청국경문제의 일시점」(김경춘, 『경주사학』6, 1987)
「백두산정계비와 간도문제」(류봉영, 『백산학보』13, 1972)
「백두산고」(김용국, 『백산학보』8, 1970)
「백두산과 간도문제」(이선근, 『역사학보』17·18합집, 1960)
집필자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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