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봉산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봉산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의 중앙에서 약간 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황해도의 중앙에서 약간 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으로 서흥군, 남동쪽으로 평산군, 남서쪽으로 재령군, 북쪽으로 황주군과 접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재령강을 건너 안악군과 마주하고 있다.

동경 125°39′∼126°04′, 북위 38°15′∼38°37′에 위치하며, 면적 836.9㎢, 인구 약 15만 196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13개 면 132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사리원읍 동리이다.

자연환경

지세는 동쪽이 산지로 높으며, 서북쪽으로 점차 경사를 이루며 낮아진다. 따라서 하천은 대개 서북 방향으로 흘러 재령강으로 들어간다. 북서에서부터 동북 방면에 걸쳐 정방산(正方山, 480m)·가마봉(可馬峰, 481m)·고려왕산(高麗王山, 571m)·보명산(保命山, 584m)·보합산(保合山, 584m) 등이 군계를 이루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군내에서 면계를 이루는 차일봉(遮日峰, 606m)·봉양산(鳳陽山, 541m)·구산(九山, 507m) 등이 있으며, 남부 군계에는 용두산(龍頭山, 268m)·국사봉(國賜峰, 335m)·주봉(周峰, 253m) 등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서북에서 북류하는 재령강과, 여기에 합류하는 지류인 서흥강(瑞興江)·은파천(銀波川)·마동천(馬洞川) 등이 있으며, 이들 유역에 기름진 평야가 전개된다. 주요 평야로는 봉산평야와 남물릿벌(일명 나무리벌) 등이 있다.

내륙 지방에 위치해 있어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보여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 9.5℃, 1월평균기온 -8.3℃, 8월평균기온 26.1℃, 연강수량 897㎜이다.

역사

[고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굴된 바 없으나, 지탑리와 송산리, 무정리의 주성(主城) 등지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했던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지탑리유적에서는 돌보습·돌낫·돌도끼 등 농기구가 출토되었고, 이와 함께 바닥이 둥근 빗살무늬토기에 탄화된 피와 조의 낟알이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농업 생산이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주요 증거가 되고 있다.

또한 지탑리와 신흥동·송산리·묘산리 등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선사 문화는 초기철기 문화로 계승되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토성내동 등 여러 곳에서 낙랑 유적이 발굴된 바 있으며, 특히 구룡리에서는 ‘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사군대방태수장무이전)’이라고 새겨진 묘전이 출토되어 이 곳이 낙랑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곳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휴암군(鵂嵒郡)이었는데 우리 말로는 조파의(租波衣)라고 하였다. 4세기 초엽에 휴류산성이 축조되었고, 대청리에서 발굴된 고분군 역시 고구려시대의 것으로서 계속하여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 통일 후 신라의 영토로 편입, 748년(경덕왕 7) 군으로 편성되어 서암군(棲嵒郡)이 되었다.

[고려]

왕건 세력이 궁예에 협조함으로써 휴암군도 태봉의 판도 안에 편입되어 905년 무렵 봉주(鳳州)로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이 곳에 방어사를 두었다가 17년 뒤 폐지되어 황주의 속군이 되었다.

1010년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운 것을 빌미로 침입한 거란군을 화주(和州)에서 격파하고 강조가 죽은 뒤 서경을 고수했던 지채문(智蔡文)이 당시 봉산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285년(충렬왕 11)봉양군(鳳陽郡)으로 고치고, 다시 방어사를 두었으나 곧 봉주로 환원되어 지군사(知郡事)가 부임하였다.

[조선]

1413년(태종 13) 현재의 지명인 봉산군으로 고쳐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총 1,564호, 6,200명으로 황해도 내에서 해주와 평산 다음으로 많았다.

삼국시대 이후 관아는 계속 휴류산성 안에 있었으나, 1523년(중종 18) 전염병이 돌아 백운산 아래에 있는 지금의 봉산읍으로 옮기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김만수(金萬壽)가 봉산의 의병을 지휘하며 왜군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바 있다. 후기의 인물로서, 실학자이자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펴낸 김정호(金正浩)를 꼽을 수 있다.

망정리와 청송리를 중심으로 하여 관정리·소기리·소부동 등에 15∼19세기의 도요지가 다수 남아 있어서 이 곳이 황해도 백자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18세기 말엽에는 군내에 7개의 장시가 발달하고 인구도 크게 증가해 1759년(영조 35)에는 총 8,705호, 3만 339명에 이르렀다.

〈봉산탈춤〉은 당초 봉산읍을 본고장으로 하여 계승되어 왔으나, 이후 새로이 문물의 중심지로 등장한 사리원으로 옮겨서 단오절 행사의 하나으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으며 사흘 밤 동안 진행되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대표적 예로 평가되고 있다.

[근 대]

1935년 당시 군청 소재지인 사리원읍과 13개 면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인구는 1942년에 총 2만 7119가구, 14만 6815명이었다. 한글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해 학문적 체계를 세운 주시경(周時經)이 근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독립운동가로는 상해 『독립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고 대한의용단을 조직해 활약한 김석황(金錫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으며 통의부·정의부 등에서 항일전을 지휘한 강명규(姜明奎) 등이 있다.

산수면 관대리에는 백자도자기공장이 세워져 국내에 공급함은 물론, 일본 등지에도 수출하였다. 광복 후 사리원읍이 시로 승격되어 13면으로 구성되었으며, 1952년과 1954년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할 때 남북으로 분리되어 각각 은파군(銀波郡)과 봉산군으로 편성,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유물·유적

군내의 문정면·토성면·초와면 등지에 많은 고적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사리원읍 철산리·신양리와 토성면 나산리·가촌리 및 초와면 관수리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토성리에는 토성지가, 석성리에는 당토성(唐土城)이, 구룡리에는 대방태수의 묘 등이 있어 선사 및 고대의 흔적이 뚜렷하다.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토성면 무정리 고읍 유지에 봉산군 교육기관의 효시인 문정서원(文井書院)이 있다. 또한 초와면 초구리에는 병자호란 다음 해인 1637년(인조 15) 봄 소현세자 및 봉림대군 일행이 중국으로 끌려가던 도중 13일 동안 유숙하였던 주련대(駐輦臺)와, 이 사실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기적비가 있다.

또 토성면 무정리녹과산 동쪽 기슭에는 휴류성의 성터가 남아 있다. 1523년(중종 18)에 읍치를 구 봉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380여 년 동안이나 녹과산을 진산으로 하고 이 성을 중심으로 읍치가 있던 곳이다.

지금의 군명인 봉산이나 옛 이름인 휴류성·봉주 등이 모두 이 성에서 연유된 것이다. 봉산이라는 이름이 고구려 때 휴류성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고구려 때부터 있던 고성임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는 성은 석성으로, 둘레 8,656척, 높이 15척이며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쌓은 것인데, 이미 절반이 허물어져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5년 광복 당시 10여 척의 성벽이 남아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고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이 성이 곧 읍성이었던만큼 이 곳 무정리에 객사·향교·누대 등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동선면 조양리에는 봉산객사(鳳山客舍)와 아사(衙舍)가 있다. 봉산객사는 동선관(洞仙館)이라 불렀으며, 처음에는 규모가 작고 좁아서 불편했으나, 군수 최극태(崔克泰)가 중건하면서 240칸으로 만들었다. 중간에 소실된 것을 1899년(광무 3) 군수 정인명(鄭寅明)이 다시 수축하였다.

문루에는 북을 달아놓았고 호각을 불어서 문을 여닫는 신호로 삼았으며, ‘海西前營門(해서전영문)’이라 쓴 현판을 달았다. 이는 인조 때부터 전영을 설치하고 봉산 군수가 전영장(前營將)의 임무를 겸하고 황주읍·봉산읍과 동리·산산(蒜山) 두 진의 병마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객사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중국 사신들이 묵던 동선별관이 있다. 아사는 지군사 최극태가 창건했는데, 처음에는 근민당(近民堂)이라 지었으나 얼마 뒤에 조양각(朝陽閣)으로 고쳤다. 문루는 문소루(聞韶樓), 아사의 동헌은 대봉헌(待鳳軒)이라 하였다.

아사 주변에는 향청(鄕廳)·작청(作廳)·전적청(田籍廳)·군무청(軍務廳)·집사청(執事廳)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반에게 공매되었는데, 이 때 이덕기(李德基) 등 지방 유지들이 아사의 문루를 사서 사리원 경암산 기슭에 경암루(景巖樓)를 지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효시는 숙종 때 토성면 문정리에 설립된 문정서원(文井書院)이다. 이 서원에는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강석기(姜碩基) 등이 배향되어 있으며, 선비들이 강학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5년에 이종준(李鐘駿)이 만천면에 설립한 3년제 실업계 중등학교인 조양농사학원(朝陽農事學院)과 1911년에 사리원에 설립된 사리원농업학교를 들 수 있다. 1924년 해주농업학교가 사리원으로 이전하여 사리원공립농업학교로 재발족할 때까지 이 두 농업학교가 군내의 중등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군내에서 특히 사리원이 교통의 중심지여서 농업은 물론 상공업까지 발달했기 때문에 각종 교육기관이 사리원에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초등 교육기관은 이른바 총독부의 1면 1교의 시책에 따라 각 읍면마다 설립되었다.

1894년(고종 31)에 공포한 〈교육법령〉에 따라, 1907년 사리원에 경산학교(景山學校)가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는 1911년에 사리원공립보통학교로 바뀌고, 얼마 뒤 사리원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후 경산국민학교로 개칭된 바 있다.

이 밖에 1908년 일본인만을 위해 설립된 사리원공립심상소학교와 1928년에 사리원에 설립된 덕성(德盛)보통학교 및 1941년에 설립된 사리원공립제2보통학교(당시 旭 보통학교) 등이 있다. 한편 1923년 사리원에 봉산노동학원이 설립되었으나, 얼마 뒤 일제의 탄압으로 폐원되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사리원공립농업학교를 들 수 있는데, 이 학교는 황해도의 대표적 농업 교육기관이었다. 이 밖에 1938년에 설립된 사리원공립상업학교와 1926년에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인 사리원공립고등여학교가 있다.

경암산에는 고려 말의 명장 김삼성(金三成)과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 말기 정국이 혼란할 때 한림학사로 있었다고 하여 김한림(金翰林)으로 불리는 부부가 산 밑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슬하에 혈육이 없어 적막하였다.

하루는 정방산사에 있다는 중이 와서 “정방산사에 가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부부는 곧 정방산사로 가서 백일치성을 드렸고, 그 뒤 낳은 아들이 김삼성 장군이다.

삼성은 낳은 즉시 일어나 앉고, 사흘째에는 문밖에 나가 걸어다녔다. 자라면서 나무칼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는데, 힘이 엄청나게 세어 주위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방산사의 중이 다시 와서 “이씨 집과는 혼인을 시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돌아갔다. 그의 나이가 열예닐곱으로 성장하니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 중 이씨 집 규수가 용모 단정해 김한림은 중의 당부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이씨 집 처녀를 맞아들였다.

혈기가 왕성한 삼성은 엄동설한에 밤이 깊도록 산야를 달리며 무술 훈련을 하다가 돌아와서는 얼음장 같은 몸으로 부인을 껴안으니 부인은 기쁨보다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삼성이 잠든 사이 겨드랑이 밑에 있는 날개를 인두로 지져 없앴다. 놀라 잠에서 깬 삼성은 7일 동안 앙천통곡하다가 죽었다.

얼마 뒤 부근 연못에서 적토마(赤兎馬) 한 마리가 나와 삼성의 집으로 달려와 슬피 울며 뛰다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뒤 이 못은 말이 나왔다고 하여 ‘매아지소’라고 불렀는데, 지금 구천리(駒泉里)의 지명이 이 매아지소에서 본뜬 것이라 전해진다.

또한 토성면녹과산 아래 휴류성터 부근에는 신룡담(神龍潭)이 있는데, 이 못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 명종 때 강직하기로 이름난 함유일(咸有一)이 황주 판관으로 왔을 때의 일이다.

부임 후 관하 군현을 시찰하던 중 봉산에 있는 못 안에 신룡이 있어 주민이 크게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고, 주민을 동원해 쓰레기와 흙으로 못을 메우게 하였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 작업이 한창 진척되었는데 난데없이 번개와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졌다. 얼마 뒤 비가 개고 나서 못을 들여다보니 흙과 쓰레기는 간 곳이 없고 물은 여전히 깊고 맑았다.

강직하고 고집세기로 이름난 함유일도 기이한 현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사람을 보내 해마다 용에게 사과하는 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후 가뭄 때는 기우제를 올렸으며 주민들이 소원을 빌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편 이 지방 특유의 문화 행사로, 〈양주별산대놀이〉와 함께 우리 나라 가면극의 효시가 되는 〈봉산탈춤〉을 들 수 있다. 이 놀이는 단옷 날행사의 하나로, 봉산구읍을 본고장으로 행해지다가 사리원이 문물의 중심지로 등장한 뒤로는 사리원으로 옮겨 경암루 아래 광장에서 진행되었다.

단옷날에 씨름 및 그네뛰기와 함께 이 놀이는 연 3일간 계속되어 모내기를 끝낸 뒤의 단오절을 흥겹게 장식하였다. 광복 후 우리 정부에서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으며, 제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산업·교통

이른바 나무리벌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봉산평야는 그 면적이 약 3만 960ha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다.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으며, 또한 전작지와 과수원이 곳곳에 발달되어 있어, 농업이 주를 이룬다.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해 조·콩·녹두·밀·수수·목화 등이 고루 경작되며 생산량이 풍부한 편이다. 특히 녹두와 땅콩의 생산은 도내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조 역시 연간 10만 석 이상이 생산되어 도내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용 작물로는 대마·청마(靑麻)가 있으며, 고구마·사과·배·복숭아 및 포도 등 과일 재배도 활발하다.

광업으로는 문정면에서 석탄, 동선면에서 석회석이 많이 산출되며, 마동시멘트공장과 봉산탄광이 유명하다. 공업에서는 제분·직조·양조·농기구 제조 등의 가공업과 경공업이 발달되어, 그 제조품은 군내는 물론 도내 전역에 공급된다.

특히 사리원에서는 제분업이 성황을 이루는데, 이는 봉산군을 비롯해 황주군·재령군·서흥군 일대에서 밀이 많이 산출되며, 이 원료와 생산품을 수송, 집산하는 데 편리한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조면·제사·직조 등의 공장도 여러 개 있어 섬유 공업도 활발한 편이며, 특히 이 곳 특산물인 누비이불은 사리원이 그 원조이고 우리 나라 누비이불의 대표로, 국내는 물론 일본·만주 등지에도 보급되어 이름나 있다.

시장으로는 사리원을 비롯한 6개소가 있는데, 사리원 5일장에서는 쌀을 비롯한 각종 곡류의 거래가 성하며, 사리원 서리에 있는 양돈 시장과 북리에 있는 우시장이 유명하다. 그 밖의 장터에서는 농산물과 고무신·의류 등의 생활 필수품이 거래된다.

교통은 경의선의 중요 통과역이 되며 황해선의 기점이 되는 사리원역이 있어 일찍부터 발달했으며, 또한 각급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운수업도 활발하였다. 국토의 남북을 종관하는 경의선이 서흥군에서 이 군의 흥수·마동·봉산·사리원·계동 등의 역을 지나 황주를 거쳐 평양으로 북상한다.

또한 사리원역을 시발점으로 도내 서부와 남부로 연결되는 황해선이 있어, 한 갈래는 재령·신천을 지나 장연을 종점으로 하고, 다른 한 갈래는 상해·신원을 거쳐 해주를 종착역으로 한다. 한편 황해선의 또 다른 지선이 미곡에서 서종면을 지나 재령으로 뻗어 있다.

도로는 철도 경의선과 병행하는 1등도로가 서흥군에서 이 군을 거쳐 평양에 이르며, 사리원에서 재령에 이르는 2등도로와 미곡에서 안악에 이르는 3등도로가 있다.

군내에는 명승지도 많은데, 예로부터 암석이 절묘한 곳으로구암(九巖)을 꼽았다. 문정면에 있는 백학암(白鶴巖)을 비롯해, 사인면의 사인암(舍人巖), 초와면의 복덕암(福德巖), 쌍산면의 창암(蒼巖), 산수면의 적암(赤巖), 토성면의 의암(衣巖), 서종면의 종암(鐘巖), 기천면의 관암(冠巖), 사리원의 청풍암(淸風巖)이 그것이다.

사인면과 서종면의 명칭은 바로 이 사인암과 종암에서 유래되었다. 구암 중에서도 주위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 예로부터 이름난 곳으로는 미아산(嵋峨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백학암을 들 수 있다. 미아산에는 높고 낮은 산봉우리가 4㎞에 걸쳐 있는데, 산세가 수려하며 백학암 동구(洞口)에 넓은 바위가 깔려 있어 일대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높이 솟은 백학암의 암벽에는 일찍이 선인이 백학을 타고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이 일대의 마을을 백학동이라 한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해 역대의 많은 문인·학자들이 백학동을 찾아와 은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사리원읍의 진산인 경암산은 그 제1봉이 봉황의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봉황산’이라고도 불린다. 동령월조(東嶺月照)·서강어적(西江漁笛)·남평무림(南坪茂林)·북악고성(北嶽古城) 등의 사가경(四佳景)은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경암산 정상에는 경암정(景巖亭)이 있는데, 여기에 오르면 재령·신천·황주·안악 일대의 평야는 물론 동쪽의 고려왕산, 서쪽의 구월산(九月山), 남쪽의 장수봉(長壽峰), 북쪽의 정방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산 서쪽 기슭에는 경암사(景巖寺) 절터가 있다. 이 절터 뒤에는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 병풍같이 둘러섰으며, 이 암벽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물맛이 청쾌하고 만병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영천(靈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읍·면

[사리원읍 沙里院邑]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31.77㎢, 인구 1만 3967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동리이다. 사리원은 사리(沙里) 또는 사원방(沙院坊)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초엽 자비령을 넘어 북쪽으로 가던 길이 막히고 대신 동선령(洞仙嶺)을 넘게 되는데,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이 곳 사리에서 많이 숙박하게 되자 사리원이 설치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원이 폐지 또는 창고 등으로 변했지만,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로 그 기능을 유지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1905년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고 해주와 장연으로 가는 두 개의 철도가 이 곳에서 분기되어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시되었다.

이와 함께 1917년 탄광이 개발되고 섬유 공업 등의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인구가 증가했고, 봉산구읍에 있던 군청도 이 곳으로 옮겨와 1934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1940년을 넘어서면서 인구가 5만 명에 육박하였다.

읍의 동북쪽에 정방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여맥이 사원리·신창리에까지 이르렀다. 그 밖의 지역은 넓은 평야로, 예로부터 이름난 나무리벌의 일부를 이룬다. 평야 중에 읍의 진산인 경암산이 우뚝 솟아 있고, 발양산(發陽山)과 한철산(漢鐵山)이 있다.

서쪽 대원리에는 수성천(壽城川)이 흐르는데 만조 때에는 광성포(廣城浦)까지 큰 배의 운행이 가능하며 이웃 만천면의 관개에도 큰 몫을 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해 조·콩·녹두·밀·사과·복숭아·포도 등이 많이 생산된다. 공업으로는 제분·직조·양조·농기구 제조 등 가공업과 경공업이 발달해 그 제품은 군내는 물론 도내 전역에 공급되며, 특히 제분업이 성황을 이룬다. 이 밖에도 조면·제사·직조 등의 공장도 여러 개 있다.

특산물로는 우리 나라에서 그 원조가 되는 누비이불이 있으며, 이것은 국내는 물론 일본·만주 등지에까지 이름나 있다. 시장은 5일장이 열리는데, 여기서는 쌀을 비롯한 각종 곡류가 거래되며, 특히 서리의 양돈 시장과 북리의 우시장이 유명하다.

교통은 국토를 남북으로 종관하는 경의선 철도가 사리원역을 통과하며, 이 역에서 도의 서부와 남부로 연결되는 황해선이 시발해 도내에서 교통의 중심지가 된다.

도로는 경의선 철도와 병행하는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이 읍을 통과하며, 2등도로가 이 읍에서 출발해 서남쪽으로 재령에 이르러 사방으로 각 지방에 연결된다.

유적으로는 철산리와 신양리 등지에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으며, 읍을 지나는 경의선 남쪽에 대방태수장무이전이 출토된 바 있는 방대형고분(方臺形古墳)이 있다. 또한 읍의 동쪽 2㎞ 지점에 갈관성(褐觀城)이 있다. 경암산정에는 목조 건물인 경암루가 있으며, 산 서쪽에는 경암사지가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에 설립된 경산학교(景山學校:1911년 사리원공립보통학교로, 광복 후 경산국민학교로 각각 개칭)를 비롯한 4개 초등학교와 1911년 해주에서 설립되어 1924년 사리원으로 이전해 재발족한 사리원공립농업학교, 1938년에 설립된 사리원공립상업학교 및 1926년 설립된 사리원공립고등여학교 등 3개 중학교가 있다.

동(東)·서(西)·상하(上下)·철산(鐵山)·신창(新昌)·사원(沙原)·사(沙)·구천(駒泉)·신양(新養)·경암(景巖)·대원(大元)·북(北) 등 12개 이가 있다.

[구연면 龜淵面]

군의 중앙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9.74㎢, 인구 8,73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관대리이다. 마식령산맥의 여맥이 면내에 이르러 구산(九山, 507m)을 이루고 있어 남부 일대는 산지로 되어 있지만, 북부 지역은 서흥강의 지류인 검수천이 흘러 넓은 평야가 발달되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게 산출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해 콩·팥·조·밀·잎담배·인삼 등을 경작한다. 특히 신원리 일대는 잎담배 재배에 알맞은 풍토가 형성되어 잎담배 재배 단지가 이루어져 있으며, 그 품질이 좋아 한때 수출되기도 하였다.

교통은 경의선이 북부를 동서로 달려 흥수·청계장의 두 역이 설치되어 있다. 경의선과 병행하여 경의가도가 뻗어 있으며, 도중에 각 주요 마을로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관대(館垈)·탑촌(塔村)·구산(九山)·화간(花間)·신원(新院)·상동(上東)·송정(松亭)·구룡(九龍) 등 8개 이가 있다.

[기천면 岐川面]

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67.80㎢, 인구 6,62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냉정리이다. 마식령산맥의 지맥이 미치어, 북부에 차일봉, 서쪽에 덕재봉(德在峰, 491m), 중앙부에 노적봉(露積峰, 210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여맥이 다시 각처로 뻗어내려 전역이 산지로 되어 있다. 각 산지 사이에 은파천·재령강이 흘러 그 유역에 작은 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해 콩·조·밀·과수·인삼 등이 경작된다. 교통은 경의선의 사리원역에서 분기되는 황해선이 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종단해 어사역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냉정리를 기점으로 하여 각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통하고 있어 교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냉정(冷井)·기산(岐山)·묵천상(墨川上)·묵천중(墨川中)·묵천하(墨川下)·어사(御史)·송탄(松灘) 등 7개 이가 있다.

[덕재면 德在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89.13㎢, 인구 5,71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창리이다. 북부에 봉양산, 중부에 덕재산(德在山, 433m)·오두산(烏頭山, 355m), 남부에 매고개[鷹峴, 214m] 등이 솟아 있어 그 여맥이 전역에 미쳐 면내에는 평야다운 평야가 거의 없다.

다만, 면의 남부를 동서로 흐르는 은파천과 그 지류의 각 유역에 작은 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로 이용되며 거주 지역이 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데,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주로 행해져 조·보리 등의 곡류를 비롯해 벼·인삼·콩·잎담배 등이 경작된다.

교통은 산악이 많은 만큼 도로 개설도 미흡해 화전·대창·적성·대구의 4개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있을 뿐이다. 철도편은 등외도로를 거쳐 경의선의 마동역과 황해선의 어사역을 주로 이용한다.

대창(大昌)·봉양(鳳陽)·청룡(靑龍)·적성(赤城)·대구(大九)·소구(小九)·덕성(德城)·화전(花田)·작시(勺詩) 등 9개 이가 있다.

[동선면 洞仙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2.68㎢, 인구 6,55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조양리이다. 동북단에 횡기산(橫氣山, 595m), 동부에 고려왕산, 서북단에 가마봉(可馬峰, 481m) 등이 솟아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이다. 그 중에도 남반부에는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어 면의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루며 거주 지역이 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해 밀·콩·조·과수 등을 경작한다. 특히 배는 예로부터 ‘봉산배’로 유명한데 근래에 과수 재배가 성해짐에 따라 도내의 명물이 되었다. 이 곳 각처에서 다량으로 채굴되는 석회석은 마동시멘트공장의 시멘트 원료로 공급된다.

교통은 경의선이 남부를 스쳐 지나갈 뿐이어서 주민들은 토성면의 봉산역을 이용한다. 그러나 1등도로가 철도와 병행하며, 등외도로가 각 주요 마을에 개설되어 있어 교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조양(朝陽)·기양(岐陽)·선령(仙嶺)·도덕(道德)·도림(桃林)·구암(龜巖)·청룡(靑龍)·독정(獨亭)·고산(高山) 등 9개 이가 있다.

[만천면 萬泉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9.78㎢, 인구 4,56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선정리이다. 사리원의 서쪽, 재령강의 동안에 해당된다. 동서 약 5㎞, 남북 약 3㎞로 군 가운데 가장 작은 면이다.

동북단에 높고 낮은 작은 구릉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이다. 서부를 재령강의 본류가 남북으로 흐르며, 지류가 동안을 흘러 이 유역에 넓은 범람원이 발달되어 재령평야로 이어진다. 이 범람원이 경작지로 개발되어 쌀을 비롯해 조·콩·밀·팥 등이 다량으로 산출된다.

교통은 경의선 철도와 사리원∼황주간의 2등도로가 동북부를 통과하며, 버스가 운행된다. 또한 등외도로가 각 주요 마을로 연결되고, 재령강을 이용한 수운도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선정(蟬井)·광성(廣城)·유정(楡亭)·해당(海棠)·만금(萬金)·길성(吉星) 등 6개 이가 있다.

[문정면 文井面]

군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한 면. 면적 38.35㎢, 인구 1만 490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산리이다. 동부에 높이 100m 내외의 구릉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모두 평야로 ‘재령나무리벌’의 일부가 된다. 지세가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남단에 재령강의 지류인 서흥강이 서쪽으로 흘러 관개에 큰 몫을 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해 밀·콩·팥·조·목화 등을 경작한다. 광산으로 사리원탄광·봉산탄광 등이 있으나 가동은 부진하다.

교통은 경의선이 북단을 조금 스쳐갈 뿐이며, 사리원에서 분기되는 황해선이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으나 정거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도로는 석성리에서 등외도로가 Y자로 교차되어 각 주요 마을로 연결된다.

구릉리에 대방태수(帶方太守) 장씨(張氏)의 묘가 있으며, 석성리에서 서종면 묘송리에 걸쳐 당토성(唐土城)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과 와전(瓦塼) 등이 발견되었으며, ‘光化五年漢氏造(광화오년한씨조)’의 명문이 있는 와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송산(松山)·어수(御水)·구룡(九龍)·석성(石城)·태봉(胎封)·용담(龍潭)·지탑(智塔)·월성(月城) 등 8개 이가 있다.

[사인면 舍人面]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65.70㎢, 인구 1만 130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계동리이다. 북부에 정방산, 남부에 발양산 등을 비롯해 여러 산악이 솟아 있으며 동반부 역시 산악지대이지만 서반부는 ‘재령나무리벌’의 일부를 이룬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 있어 쌀을 비롯한 콩·조·밀·잎담배 등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게 산출되어 이 지대를 황해도의 곡창이라고 일컫는다. 동부 산지에서는 밭농사가 훨씬 활발하다.

교통은 경의선이 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달려 계동역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쪽의 사리원역도 계이에서 불과 4㎞ 이내의 거리에 있다.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이와 병행하고 있으며, 계이를 중심으로 각 주요 마을로 3등도로 또는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북부의 정방산에는 유명한 성불사(成佛寺)가 있다. 한편 이 곳에 있는 사인암(舍人巖)은 봉산구암(鳳山九巖)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계동(桂東)·국사(國祀)·대룡(大龍)·만화(萬和)·용림(龍林)·영중(嶺中)·안곡(安谷)·산산(蒜山)·문구(文龜)·용현(龍峴)·내요(內堯)·봉의(鳳儀)·검천(劒川)·명류(明柳)·월산(月山) 등 15개 이가 있다.

[산수면 山水面]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113.85㎢, 인구 6,52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현리이다. 북쪽으로 자비령(慈悲嶺, 489m)·보섭산(保燮山, 538m) 등의 높은 산악이 연달아 솟아 있어 전반적으로 산악지대를 이룬다.

하지만 산세는 남쪽으로 점차 낮아져 남부 지역은 서흥강의 지류인 검수천의 유역 평지를 포함해 평야지대를 이룬다.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가 되어 보리·콩·팥·조·벼·인삼 등이 경작된다.

관정리에 군내에서는 처음으로 백자 공장이 세워져, 그 제품은 각 지방으로 반출된다. 교통은 남단의 면계를 따라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여기서 다시 주요 마을로 3등도로 또는 등외도로가 뻗어 있다. 철도는 면외를 달리는 경의선의 흥수·청계·마동의 세 역을 이용한다.

용현(龍峴)·고려(高麗)·천덕(天德)·청송(靑松)·성수(聖壽)·오봉(五峰)·내성(內城)·망정(望亭)·관정(館亭) 등 9개 이가 있다.

[서종면 西鍾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99㎢, 인구 7,82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한리이다. 보통 ‘나무리벌’이라 부르는 재령평야의 중추부가 된다. 이 평야의 중부에서는 서흥강이, 남부에서는 은파천이 다같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부의 군경계에서 재령강 본류에 합쳐진다. 재령강은 서부를 여러 번 곡류하며 북쪽으로 흐른다.

평야는 잘 개발되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게 산출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해 콩·조·밀·배추·목화·팥 등이 있다. 특히 쌀은 ‘나무리벌쌀’이라 하고, 배추는 ‘서종벌배추’라 하여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교통은 황해선이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서종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 철도와 병행하여 사리원∼재령간의 2등도로가 통과하며 버스가 운행된다. 이 도로에서 각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뻗어 있어 교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유적으로는 묘송리에서 문정면 석성리에 걸쳐 당토성지(唐土城址)가 있다.

대한(大閑)·흥수(興壽)·묘송(妙松)·간촌(間村)·온채(溫寨)·추진(楸津)·홍(弘)·예로(禮老)·화(禾)·단장(丹檣)·노산(魯山) 등 11개 이가 있다.

[쌍산면 雙山面]

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72.69㎢, 인구 6,32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정리이다. 멸악산맥의 주맥이 미쳐 남쪽에 국사봉(國賜峰, 335m), 북쪽에 장재산(長在山, 292m), 서쪽에 삼봉산(三峰山, 268m) 등이 솟아 있다.

이들의 여맥이 다시 전역으로 뻗어 각처에 높고 낮은 구릉을 형성해 이 면은 전반적으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평지가 적다. 다만 구릉 사이를 흐르는 은파천과 그 지류의 연안에 소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 또는 주거지로 이용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밭농사가 대부분이어서 밀·조·팥·콩·메밀 등이 경작된다. 교통은 면의 중앙부를 신막(新幕)∼신원(新院) 간의 3등도로가 통과하여 황해선과 연결되고, 또 각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통한다. 인물로는 이 곳 ‘우릉골’에서 태어나 한글연구에 선구자가 된 주시경을 들 수 있다.

송정(松亭)·궁대(宮垈)·전산(錢山)·갈현(葛峴)·화양(花陽)·요강(要江)·용산(龍山) 등 7개 이가 있다.

[영천면 靈泉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43㎢, 인구 5,65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미곡리이다. 동부에 높고 낮은 작은 구릉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로 재령평야의 일부가 된다. 특히 재령강과 그 지류의 유역은 경작지로 개발되어 주요 생산 지대가 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쌀을 비롯해 보리·콩·조·감자 등을 경작한다. 교통은 경의선의 사리원역에서 분기되는 황해선이 면의 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달리며 미곡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 곳을 기점으로 하여 사리원과 재령 방면으로 2등도로가, 서쪽 안악 방면으로 3등도로가 통하며, 각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연결된다. 한편 재령강의 수운도 편리해 교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미곡(嵋谷)·가산(佳山)·갑현(甲峴)·강락(江樂)·길상(吉祥)·수성(壽城)·경천(敬天)·해서(海西) 등 8개 이가 있다.

[초와면 楚臥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5.27㎢, 인구 1만 269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은파리이다. 동쪽에 차일봉, 남쪽에 우기산(禹岐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뻗어내려 동남부는 주로 산지대가 된다. 그러나 서북부는 중앙부를 은파천이, 북부를 재령강이 흘러 유역에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이른바 ‘재령나무리벌’의 일부가 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쌀을 비롯해 밀·콩·조·목화·과수 등을 경작한다. 특히 목화는 단지 재배를 장려해 품질을 향상시켰다. 근래에는 과수 재배가 각처에서 성하게 되었으며, 양이의 대추는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교통은 사리원에서 분기되는 황해선이 북으로 지나며 은파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뻗어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명승지로는 복덕암 위에 팔경정(八景亭)이 있는데,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유랑가〉에서 “창곡이 넘고 찼다 은파 사리원/이래도 어느 인생 줄임에 우나.”라고 하면서 특히 면민의 생활이 풍족함을 나타내었다.

은파(銀波)·덕암(德巖)·초구(楚邱)·세류(細柳)·용석(龍石)·회루(回樓)·양동(養洞)·관수(寬秀)·태안(太安)·입봉(立峰)·대청(大靑)·구암(龜巖)·장산(長山)·유정(柳亭) 등 14개 이가 있다.

[토성면 土城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66.60㎢, 인구 9,79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마산리이다. 남동쪽에 봉양산, 남서쪽에 차일봉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북방으로 뻗어 서흥강까지 이른다.

북부는 멀리 고려왕산의 여맥이 미쳐 몇 개의 높고 작은 구릉이 있지만 대체로 평야지대이다. 특히 이 평야를 서쪽으로 흐르는 서흥강의 연안은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 시설도 잘되어 있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게 경작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로 쌀을 비롯해 밀·콩·조·팥 등이 생산된다. 교통은 경의선이 서흥강 북안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며, 면내에 마동역과 봉산역이 설치되어 있다.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이 철도와 거의 병행하며, 도중에 각 주요 마을에 이르는 등외도로가 통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무정리의 녹과산(祿科山) 동쪽 기슭에 고구려시대의 읍치(邑治) 소재지이던 휴류성지가 있다. 그 밖에 문정서원과 깊은 사연을 간직한 문무정(文武井)이 있다.

마산(馬山)·비정(碑井)·무정(武井)·토성(土城)·나산(羅山)·가촌(佳村)·율(栗)·함릉(咸陵)·창촌(倉村) 등 9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봉산군의 북쪽 반 가량을 차지하는 동선면(洞仙面)·문정면(文井面)의 대부분과 사인면(舍人面)·산수면(山水面)·토성면(土城面)·구연면(龜淵面) 및 서흥군 목감면(木甘面)의 일부로 봉산군이 개편되었다.

1954년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눌 때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1973년 미곡리·만금리·어수노동자구가 분리되어 사리원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황해북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서흥군, 남쪽은 인산군·은파군, 북쪽은 황주군·연탄군, 서쪽은 재령강(載寧江)을 사이에 두고 안악군·재령군에 접해 있다. 사리원시를 둘러싸고 있는 군이다.

동경 125°39'∼126°07', 북위 38°23'∼38°37'사이에 있으며, 면적 463㎢, 인구 10만여 명이다. 행정구역은 봉산읍과 가촌(佳村)·섬정(蟬井)·지탑(智塔)·토성(土城)·송산(松山)·대룡(大龍)·정방(正方)·봉의(鳳儀)·문현(文峴)·구읍(舊邑)·독정(獨亭)·마산(馬山)·천덕(天德)·오봉(五峰)·관정(館亭)·구연(龜淵)·청계(淸溪)·유정(柳亭)·청룡(靑龍) 등 1개 읍 19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봉산읍이다.

이 군은 재령평야의 동쪽 일부를 차지하며 낮은 구릉이 많다. 군의 북쪽은 정방산맥(正方山脈)이 동서로 뻗으며 주봉인 정방산에서 삼봉산(三峰山, 365m)·안장산(鞍長山, 530m)·자비산(慈悲山, 691m)·전주산(錢鑄山, 652m) 등으로 이어져서 북방 호족(胡族)의 남침을 막는 천연의 방위선을 형성하고 있다. 이 사이를 협곡을 이룬 사인관(舍人館)골이 뚫려서 남북을 잇는 통로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전주산에서 성문산(城門山, 439m)으로 이어져 서흥군과 경계를 형성하고 서쪽은 재령평야로 낮아진다. 남쪽에는 봉양산·차일봉 등이 솟아 은파군과 자연 경계를 이루고, 남동쪽 끝에는 서흥강을 막아서 조성된 서흥호(瑞興湖)가 있다.

이 군은 파랑상 구릉을 이루는 지형이기는 하나 고려왕산·오봉산(五峰山, 601m) 등과 같은 높은 잔구가 솟아 있으며, 상부원생대층(上部原生代層)의 석회암이 두텁게 퇴적되어 있다.

연평균기온은 10.1℃, 월평균기온은 1월이 -7℃, 8월이 25℃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19.5㎜이다. 토양의 대부분은 산림갈색토이며, 평야지대에는 충적토가 쌓여 있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잣나무·이깔나무 등이다.

재령평야의 동부를 차지해 토질이 비옥하고, 농업 연구 도시인 사리원시에 인접해 있어 농업이 잘 발달하였다. 서흥호·은파호 등 관개 시설이 갖추어져서 농산물 생산액 중에서 벼가 64% 가량을 차지하며, 옥수수·보리·콩 등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봉산 대추와 봉산 포도는 이 지방의 명산물로 알려져 있고, 수박은 특산물로 지정되어 있다. 사과·배·복숭아 등도 유명하다.

마산리(馬山里)에 있는 봉산탄전(鳳山炭田)에서는 갈탄(褐炭)이 채굴되어 부근에 있는 2·8시멘트공장에서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 2·8시멘트공장은 근년에 봉산탄전의 갈탄 생산량이 격감함에 따라 가동을 줄이고 있다. 시멘트의 질도 떨어져서 수출량도 크게 줄었다. 그러나 평양·해주·흥남·천내리 등의 시멘트공장과 함께 북한이 자랑하는 공장이다.

교통망으로는 군의 중앙을 평부선 철도, 평양·개성간고속도로, 1호국도(목포∼서울∼신의주)가 횡단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황해청년선(黃海靑年線:사리원∼해주)이 종관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1957년 지탑리(智塔里)에서 발굴된 지탑리유적(북한 사적)을 비롯해 지탑리토성(북한 사적)이 있고, 녹과산에는 휴류산성(북한 사적)이 있다. 우리 나라 33본산의 하나인 성불사(成佛寺:북한 국보급 문화재)는 정방산성(正方山城) 안에 있다.

이 절에는 성불사오층석탑(북한 국보급 문화재)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응진전(應眞殿)·극락전(極樂殿) 등이 있는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7년에 모두 재건하였다.

또한 마산리(馬山里)에 문정서원(文井書院)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진 채 복구되지 못하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한편 〈양주산대놀이〉와 함께 우리 나라 가면극(假面劇)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봉산탈춤〉은 군중놀이로 변질되어 적화통일을 위한 선동자료로 쓰이고 있다. 봉산탈춤의 정통은 오히려 6·25전쟁 때 월남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서울지방에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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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봉산군지』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1)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이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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