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 산하 11개 면과 3개 읍에 속하는 여러 마을에서 마을 주민인 농민들에 의해 행해졌다. 북청군의 사자놀이는 댓벌[竹坪里]사자(여기에는 이촌(李村)사자, 중촌(中村)사자, 넘은개사자가 속함), 동문(東門)밖사자, 후평사자, 북리(北里)사자, 당포(棠浦)사자 등이 유명했으며, 그 밖에 마을마다 제각기 사자를 꾸며 놀았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이 중심이고, 애원성춤, 사당춤, 거사춤, 무동춤, 넉두리춤, 꼽추춤, 칼춤 등은 사자춤을 추기 전에 여흥으로 추는 것이다. 남한에서 복원된 북청사자놀음에는 사자가 2마리 등장하지만, 원래 북청 지방에서는 사자가 1마리만 등장했다. 현재는 사자탈춤 외에 애원성춤, 사당 · 거사, 무동, 꼽추, 칼춤, 승무, 대사, 의원, 양반, 꼭쇠 등이 나온다.
1955년 겨울에 북청 지방을 현지 조사한 김일출에 의하면, 죽평리 사자놀이에는 피리 4개, 퉁소 4개, 꽹과리 1개, 징 1개, 새납 1개, 소고 1개, 큰북 1개 등의 악기와 함께, 놀이꾼으로 사자 외에 꼭쇠, 양반, 대사, 점바치(점쟁이), 의원, 굴중(상모) 돌리는 사람, 소고를 든 거사 2명, 무동이 나온다.
사자춤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 중 최치원(崔致遠: 857~?)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 중 「산예(狻猊)」에서 발견된다. 고려시대의 사자춤은 이색(李穡: 13281396)의 「구나행(驅儺行)」, 조선시대의 사자춤은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유득공(柳得恭: 1749?)의 『경도잡지(京都雜志)』 권1 성기(聲伎) 조의 「산희(山戱)」,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1843), 『국연정재창사초록(國讌呈才唱詞抄錄)』 중 고종(高宗) 24년(1887) 궁중에서 연행된 성천 잡극(成川雜劇)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사자춤과 관련된 그림은 일본 악서(樂書)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의 「신라박(新羅狛)」, 한글본 『정리의궤 삼십구 성역도』의 채색화 「낙성연도(落成宴圖)」, 김홍도(金弘道: 1745~?)의 「평안감사향연도」 등에서 발견된다.
애원성춤은 사자놀이를 놀기 전에 흥을 돋우기 위해 민요를 부르며 춤을 추는 과장이다. 사당 · 거사춤은 소고를 든 거사 2인과 사당 2인이 등장해 춤춘다. 무동춤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각각 어른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1쌍의 무동춤을 연출한다. 넉두리춤은 여러 명의 여성들이 등장해 제각기 놀이판 가운데서 춤추는 과장이다. 이 춤은 양팔을 옆으로 들고 움직이는 동작과 머리를 숙인 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면서 춤추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손목을 돌리며 잔가락을 쓰고, 발의 뒤축을 살짝살짝 들면서 춤추는 것도 이 춤의 특징이다. 꼽추춤은 꼽추로 가장한 연희자가 혼자 나와서 춤을 추는 내용이다. 가슴과 등에 헝겊을 넣어 불룩 튀어나오도록 하고 흥겹게 춤추는 모습은 장애인에 대한 동정보다는 오히려 웃음을 자아낸다. 춤사위는 뒤뚱거리며 걷는 것, 앉아서 어기적거리며 걷는 것 등 정해진 몇 가지 동작을 연출한다. 칼춤은 2명의 연희자가 칼을 잡고 신나게 춤추면서 묘기를 보이는 과장이다.
초장, 중장, 말장으로 구성된 사자춤은 커다랗게 튕기는 듯 탄력적이고 힘차며 역동적인 율동이 특징이다. 초장은 사자들이 몸을 푸는 과장이다. 사자는 좌 · 우 · 하 · 상(左右下上)의 순서로 머리를 힘차게 돌리는데, 이것을 ‘모래기친다’고 한다. 사자 몸채와 머리에 왕방울을 달아 사자가 모래기를 칠 때마다 딸랑거렸다. 왕방울소리는 사자의 등장과 위용을 과시하면서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
중장에서 사자들은 엎드리고, 기고, 뛰고, 입 맞추고, 몸을 털고, 머리를 좌우로 돌려 이도 잡고, 꼬리를 흔들며 몸을 긁기도 하는 등 온갖 기교를 부린다. 이때 승무가 들어와 사자를 중심으로 한삼을 공중에 뿌리면서 춤춘다. 사자는 한참 신나게 춤을 추다가 양반이 준 토끼를 잡아먹고 쓰러진다. 양평리 등 현지에서는 사자가 잡아먹는 것이 어린아이였다. 토끼를 먹은 사자가 쓰러지면 그때까지 등장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사자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늘어선다. 대사가 등장해 염불을 하지만 소용이 없자, 의원이 들어와 침을 놓고 감로수를 먹여 살린다. 죽평리에서는 사자가 쓰러지면 우선 점바치(점쟁이)가 나와서 병점(病占)을 치고, 이어서 중과 의원이 나왔다고 한다.
사자가 소생하면 사자춤 말장으로 넘어간다. 사자가 다시 살아나 춤을 추면 승무가 다시 들어오고, 이때 사자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나서 입사자(立獅子)춤을 춘다. 입사자춤 후에 거사 2인이 들어와 원을 그리며 놀이판을 돌면서 소고춤을 춘다.
각 마을의 사자놀이패는 정월 4일부터 14일까지 집집마다 방문해 사자놀이를 놀았다. 먼저 마당으로 들어가서 한바탕 춤을 추고, 안방이나 부엌 등에 들어가 악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한 후, 마당으로 나온다. 이때 주인의 청에 따라 부엌의 조왕과 시렁 앞에 엎드려 조상신에게 절을 한다. 사자는 부엌에서 바가지를 물고 나와 마당에서 발로 밟아 부수는데, 이는 소리를 통해 악귀를 쫓으려는 의도이다. 아이를 사자에 태워 주면 수명이 길어진다거나, 사자 털을 몰래 베어 두면 장수한다는 관습도 있었다.
북청사자놀음은 나례의 유풍(遺風)으로 간주된다. 나례는 연말에 역병과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이다. 사자춤은 중국과 한국의 나례에서 모두 발견된다. 고려 말 이색의 「구나행」은 고려시대의 나례에서 사자춤이 연행된 사실을 전해 준다.
북청 지방의 사자놀이패는 정월 4일부터 14일까지 마을의 집집마다 방문해 나례의 매귀(埋鬼), 즉 지신밟기와 유사한 의식을 행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벽사적인 기능을 하지만, 특히 사자가 왕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집안 구석구석의 잡귀를 쫓는 모습은 바로 나례의 매귀라고 하는 행사와 완전히 일치한다.
북청사자놀음은 백수의 왕으로서 벽사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자를 탈춤으로 수용해 전래한 세시풍속이다. 즉 북청사자놀음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면서 악귀를 내쫓고자 거행했던 민속놀이이다. 사자놀이가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각 마을 자체로 사자놀이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각 가정마다 방문해 사자를 놀아 주고, 그때 생긴 곡식을 마을의 공공사업(장학회, 빈민 구제, 경로회 비용, 사자놀이 비용 등)에 사용함으로써 모든 마을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1년에 한 번 큰 명절을 맞이해 밤새도록 춤과 노래를 즐기며 흥과 신명을 푸는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긴장을 풀어 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활력을 되찾아 새해를 시작하는 오락적 기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