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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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가면극.
이칭
이칭
산대도감극, 산대도감놀이, 산대놀이, 본산대놀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산대극은 흔히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가면극이다. 조선 전기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왕의 환궁 행사, 내농작 등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연행한 각종 잡희를 산대희라고 불렀다. 산대도감극은 이런 행사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산대도감극은 산대희로부터 생겨난 가면극을 가리킨다. 산대도감극을 줄여 ‘산대극’이라고 부른다.

목차
정의
흔히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가면극.
내용

산대에는 고정형 대형 산대인 대산대(大山臺), 이동형 소형 산대인 주1, 다정산대(茶亭山臺)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신라 진흥왕 이래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를 거행할 때 산대 또는 주2 앞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행했다.

중국 사신의 주3 행사, 왕의 주4 행사, 주5 등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이것을 공연하면 주6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행사를 대규모로 진행했기 때문에, 주7 또는 나례도감이라는 임시 조직을 두어 산대의 설치와 산대희를 관장하게 했다.

봉산탈춤의 영감 대사 중 “… 주8주9 이곳저곳 다니면서 해 먹을 것이 있드냐. 때음쟁이 통을 사서 걸머지고 다녔드니, 하루는 산대도감을 만나서 산대도감의 말이 인왕산 모로는 호랑이 어디 있으며, 산대도감 모르는 주10가 어디 있드냐. 너도 세금 내여라 하길래 세금이 얼마냐 물었드니 …”라는 내용을 통해,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패를 산대도감이라 부른 사례도 볼 수 있다.

중국 사신의 영접 행사에서 놀이꾼들은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쳤다. 1626년(인조 4),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준비 절차를 기록한 주11에 의하면, 당시 좌변나례도감에만 경기도 주12 30명, 충청도 재인 52명, 경상도 재인 33명, 전라도 재인 171명 등 총 286명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우변나례도감까지 합하면, 이 행사에 동원된 재인들은 500명이 넘었을 것이다.

더욱이 『광해군일기』 12년(1620년) 9월 3일 조에 의하면,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대산대는 광화문 밖에 두 개를 설치했는데, 이를 위해 의금부가 1,400명, 군기시가 1,300명의 수군(水軍)을 동원했다. 그리고 이 산대를 주13처럼 꾸미기 위한 잡상에도 많은 물품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행사를 원만하게 치르기 위해 대규모의 임시 조직인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의 설치가 필요했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는 그가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지은 것이다. 이 가면극은 서울의 산대극 즉, 본산대놀이를 묘사한 것인데, 상좌춤, 노장과장, 샌님과 포도부장춤, 거사와 사당춤, 영감할미과장 등 현재 전승되고 있는 양주 별산대놀이, 봉산탈춤 등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개화기 이후 산대극 즉 서울 본산대놀이의 전승은 단절되었지만, 현재도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성립된 서울 · 경기도의 별산대놀이(송파 · 양주 · 퇴계원), 황해도의 해서 주14(봉산 · 강령 · 은율 등), 경남의 야류(수영 · 동래 등)와 오광대(고성 · 통영 · 가산 · 진주 · 김해 등) 등이 전승되고 있다. 이 가면극들은 각 주15의 구성과 연희 내용, 등장인물, 대사 형식, 극적 형식, 가면의 유형 등을 살펴볼 때, 동일 계통임이 드러난다.

산대극은 산대희(산대놀이)의 연희자 즉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의 공연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산대극을 산대도감극 또는 본산대놀이라 부른다. 그리고 산대도감계통극을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193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의 주관 아래 연희자 조종순(趙鍾洵)의 구술을 김지연(金志淵)이 필사한 양주 별산대놀이 대본을 『산대도감극각본』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이두현, 『한국가면극(韓國假面劇)』 (문화재관리국, 1969)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전경욱, 『산대희와 본산대놀이』 (민속원, 2021)
주석
주1

산대놀음 따위와 같은 민속놀이를 하기 위하여 큰길가나 빈터에 마련한 임시 무대. 우리말샘

주2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 무대. 신라 진흥왕 때 시작한 팔관회에서부터 설치된 기록이 있다. 우리말샘

주3

손님을 맞아서 대접하는 일. 우리말샘

주4

임금이나 왕비, 왕자 등이 대궐로 돌아옴. 우리말샘

주5

음력 정월 보름날 궁중이나 민가에서 볏짚으로 곡식 이삭을 만들어 그해에 풍년이 들기를 빌던 일. 궁중에서는 좌우로 편을 나누고 솜씨를 겨루어 이긴 편에게 상을 주었다. 우리말샘

주6

탈을 쓰고 큰길가나 빈터에 만든 무대에서 하는 복합적인 구성의 탈놀음. 바가지, 종이, 나무 따위로 만든 탈을 쓰고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광대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하고 이야기를 한다.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까지 궁중에서 성행하였으나 후에 민간에 전파되어 탈놀음 중심의 평민극으로 이어졌다. 현대 산대놀이 계통의 것으로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오광대놀이 따위가 전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7

산대놀음을 하는 사람의 단체. 우리말샘

주8

‘아랫녘’의 방언 우리말샘

주9

어떤 곳에 다다르다. 우리말샘

주10

‘땜장이’의 방언 우리말샘

주11

조선 인조 4년(1626)에 중국 명나라 사신이 태자의 탄생을 알리는 조(詔)를 반포하기 위해 조선에 왔을 때 행한 나례를 기록한 책. 1책. 우리말샘

주12

재주가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13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 동쪽 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14

황해도 일대의 탈춤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강령 탈춤, 봉산 탈춤 따위가 대표적이다. 우리말샘

주15

탈놀이에서, 현대극의 막이나 판소리의 마당에 해당하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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