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에는 고정형 대형 산대인 대산대(大山臺), 이동형 소형 산대인 주1, 다정산대(茶亭山臺)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신라 진흥왕 이래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를 거행할 때 산대 또는 주2 앞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행했다.
중국 사신의 주3 행사, 왕의 주4 행사, 주5 등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이것을 공연하면 주6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행사를 대규모로 진행했기 때문에, 주7 또는 나례도감이라는 임시 조직을 두어 산대의 설치와 산대희를 관장하게 했다.
봉산탈춤의 영감 대사 중 “… 주8을 주9 이곳저곳 다니면서 해 먹을 것이 있드냐. 때음쟁이 통을 사서 걸머지고 다녔드니, 하루는 산대도감을 만나서 산대도감의 말이 인왕산 모로는 호랑이 어디 있으며, 산대도감 모르는 주10가 어디 있드냐. 너도 세금 내여라 하길래 세금이 얼마냐 물었드니 …”라는 내용을 통해,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패를 산대도감이라 부른 사례도 볼 수 있다.
중국 사신의 영접 행사에서 놀이꾼들은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쳤다. 1626년(인조 4),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준비 절차를 기록한 주11에 의하면, 당시 좌변나례도감에만 경기도 주12 30명, 충청도 재인 52명, 경상도 재인 33명, 전라도 재인 171명 등 총 286명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우변나례도감까지 합하면, 이 행사에 동원된 재인들은 500명이 넘었을 것이다.
더욱이 『광해군일기』 12년(1620년) 9월 3일 조에 의하면,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대산대는 광화문 밖에 두 개를 설치했는데, 이를 위해 의금부가 1,400명, 군기시가 1,300명의 수군(水軍)을 동원했다. 그리고 이 산대를 주13처럼 꾸미기 위한 잡상에도 많은 물품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행사를 원만하게 치르기 위해 대규모의 임시 조직인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의 설치가 필요했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는 그가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지은 것이다. 이 가면극은 서울의 산대극 즉, 본산대놀이를 묘사한 것인데, 상좌춤, 노장과장, 샌님과 포도부장춤, 거사와 사당춤, 영감할미과장 등 현재 전승되고 있는 양주 별산대놀이, 봉산탈춤 등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개화기 이후 산대극 즉 서울 본산대놀이의 전승은 단절되었지만, 현재도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성립된 서울 · 경기도의 별산대놀이(송파 · 양주 · 퇴계원), 황해도의 해서 주14(봉산 · 강령 · 은율 등), 경남의 야류(수영 · 동래 등)와 오광대(고성 · 통영 · 가산 · 진주 · 김해 등) 등이 전승되고 있다. 이 가면극들은 각 주15의 구성과 연희 내용, 등장인물, 대사 형식, 극적 형식, 가면의 유형 등을 살펴볼 때, 동일 계통임이 드러난다.
산대극은 산대희(산대놀이)의 연희자 즉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의 공연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산대극을 산대도감극 또는 본산대놀이라 부른다. 그리고 산대도감계통극을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193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의 주관 아래 연희자 조종순(趙鍾洵)의 구술을 김지연(金志淵)이 필사한 양주 별산대놀이 대본을 『산대도감극각본』이라고 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