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통고(文獻通考)』 「악고(樂考)」 20 산악백희(散樂百戱) 조를 통해 ‘산악백희’가 하나의 용어로 사용된 사례를 볼 수 있으나, 흔히 ‘산악’과 ‘백희’를 독립적인 용어로 사용한다. 중국에서 ‘산악’은 원래 주대(周代)부터 사용되었지만, 주1 말부터 수대에 걸쳐서 점차 ‘산악’이 ‘백희’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 ‘산악’은 궁정의 악무인 ‘아악’과 대칭되는 의미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권123 「대완전(大宛傳)」과 『한서』 「서역전」 안식국 조, 당나라의 두우가 편찬한 『통전』(801년)에 의하면, 산악백희는 중국 자생적 전통의 연희와 중국 주변 민족들의 연희도 있으나, 상당수는 주2에서 전래한 것이다. 특히 주3이 한나라 때부터 서역에서 다수 유입되었다. 이때의 서역은 주4는 물론이고, 안식(安息)이라고 불리던 페르시아(현, 주5, 선국(撣國)이라고 불리던 미얀마 지역, 그리고 여헌(黎軒)이라고 불리던 로마 및 이집트의 주6를 포함한다.
산악백희는 한 · 위부터 본격적으로 서역에서 유입되기 시작하여, 수 · 당을 통하여 계속 흘러들어 왔고, 특히 남북조시대에 많이 전래했다. 후대에는 그 연행 종목이 더욱 다양해지고 세분되면서 다양한 변천 과정을 거쳤는데, 오늘날에는 ‘잡기’라는 명칭으로 전승되고 있다. 산악백희의 종목은 크게 (1) 곡예와 주7, (2) 환술(幻術), (3) 각종 동물 탈춤, (4) 동물 재주 부리기, (5) 괴뢰희(傀儡戱)라고 불린 인형극, (6) 골계희(滑稽戱), (7) 주8, (8) 악기 연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중국 주9의 기록, 일본에 전하는 고구려악, 고구려의 고분벽화 등을 볼 때, 고구려에서는 4세기 이전부터 산악백희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는 나무다리 걷기(수산리 고분 · 팔청리 고분), 공 받기(장천1호분), 곤봉 받기(약수리 고분), 곤봉과 공을 엇바꾸어 받기(수산리 고분 · 팔청리 고분 · 약수리 고분), 바퀴 돌려 올리기(수산리 고분 · 장천1호분), 말타기 재주(약수리 고분 · 팔청리 고분), 칼 재주 부리기(팔청리 고분 · 안악 제3호분의 행렬도), 씨름(각저총 · 장천1호분), 주10 (무용총 · 안악 제3호분) 등 곡예에 해당하는 연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주11 (안악 제3호분) 등 연극적 놀이와 북, 장구, 주12, 주13, 긴 퉁소 등의 악기 연주가 보이며, 원숭이 재주 부리기(장천1호분) 같은 동물 곡예 등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이런 연희들을 백희, 가무백희, 백희잡기, 잡희, 산대잡극, 산대희, 나희 등으로 불렀는데,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들과 함께 변화, 발전을 통해 토착화되면서 한국적 독자성을 띤 연희로 성장했다.
산악백희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으로 보유했던 연희 문화이다. 산악백희에 주목함으로써 한국 전통 연희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각종 문헌에 정착된 연희 자료들을 일관되게 꿰뚫어 해명할 수 있다. 아울러 산악백희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추적을 통해 한국 전통 연희의 갈래, 분포, 담당층, 후대 연희와의 관련 양상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가능하다.
산악백희는 그 한국적 변용을 통해 토착화되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본산대놀이 가면극,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등 발전된 양식의 연극적 갈래들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