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17세기에 집권한 사대부들은 사회 자체가 변화·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조화된 성리학에 집착하여 이기논쟁, 예절논쟁이나 하면서 국민의 현실생활과는 동떨어진 공리공담을 일삼았다.
이에 대한 성리학 내부의 반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윤휴(尹鑴)나 박세당(朴世堂) 같은 학자가 출현했으나, 집권파 주자학 추종자들의 사고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따라서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부정하고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도 교조적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시도되어 명나라의 양명학(陽明學) 도입이 추구되었다. 양명학은 주로 정권에서 배제된 경기지방의 소론 학자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완전히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여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양명학자 중 점차 주자학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로부터 완전히 절연한 채 양명학의 독자적인 정립을 추구한 사상가들이 나타났으며, 특히 정제두(鄭齊斗)는 조선의 양명학을 학문사상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더욱 획기적인 것은, 17세기에 성리학의 공리공담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으로 부국유민(富國裕民),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할 수 있는 실용지학(實用之學)을 추구하는 실학사상이 대두되어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실학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의하여 한국의 사회사상은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종교·철학 사상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전면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이이의 변법사상을 계승하면서 17세기에 이수광(李睟光), 한백겸(韓百謙), 김육(金堉), 유형원(柳馨遠) 등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인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실용지학을 주장하고 균전제(均田制) 실시, 수공업기술 발전, 화폐주조와 화폐유통, 화포·조총 등의 신무기 수용, 거북선의 대량 조선과 수군의 강화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세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문명과 접하게 되자 서양의 과학기술과 서학(西學)을 전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백겸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고, 『동국지리지』 등을 저술하여 한국의 역사지리에 관한 여러가지 새로운 고증을 제시하였다.
김육은 신역법(新曆法)을 채용하고 수차(水車)제도와 용차(用車)의 이익을 주장했으며, 화폐주조와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학은 아직 체계화된 학문과 사상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가 유형원에 이르러 체계화된 새로운 사상과 학문으로 확립되었다.
유형원은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농촌에서 현실을 체험해 가면서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실학사상에 바탕을 둔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 부문에 걸친 포괄적인 사회개혁안을 그의 저서 『반계수록 磻溪隨錄』을 통해 제시하였다.
유형원은 당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를 왕족과 양반층의 대토지겸병에 따라 일반 농민이 소작농으로 몰락하게 되는 토지문제라고 보고, 토지 개혁이 모든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토지개혁안의 기본원리는 공전제(公田制)로서의 토지균분이었다.
그는 대지주의 겸병된 토지를 수용하여 신분에 따라 일반 농민에게는 1경, 선비와 관리에게는 직급에 따라 2∼12경의 토지를 나누어 지급하고, 토지를 분배받은 자가 죽으면 그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분배하도록 하였다. 또 지세는 생산량의 20분의 1로 통일하는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세습노비제도를 궁극적으로 폐지해야 할 천하의 악법이라고 비판하고, 우선 노비에게도 농민과 동일하게 1경의 토지를 분배하였으며, 무예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에게는 면천(免賤)의 특전을 주어 노비를 줄여 나가다가, 고용 노동자 또는 머슴제도가 일반화하면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폐단이 많은 과거제도를 영구히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를 채택하되, 관리가 될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 군·현 단위, 도 단위, 전국 단위의 3단계 학교를 세워 국비생으로 교육한 다음, 문벌이나 신분에 전혀 상관없이 능력 위주로 선발하는 등용의 선발방안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해서 농민은 4경에서 1병(兵)을 내고 나머지 3병은 보부(保夫)로서 출병자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며, 노비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는 노비도 속오군(束伍軍)을 편성하면 정병 31만 명, 속오군 62만 명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군의 편성에는 지휘관을 고정시켜 주고 부모와 가정이 있는 향토와 결합해서 배치해 주면 전투력이 배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이 밖에도 봉급제도의 개혁, 군현제도의 개혁, 도량형의 통일, 복식제도의 개혁, 교량 건설 등 다수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17세기에는 이러한 실학사상의 확립과 더불어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연구 성과가 많이 나왔는데, 신숙(申洬)의 『농가집성 農家集成』, 박세당의 『색경 穡經』,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山林經濟』 등은 그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실학의 사회사상은 18세기에 와서 그 연구 범위와 깊이가 확대되고 더욱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학사상가들 속에서 사제관계를 중심으로 학파도 형성되었다.
이익(李瀷)은 유형원의 실학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많은 연구를 더하여 독자적인 실학사상을 수립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성호학파(星湖學派)를 형성하였다.
성호학파에 속하는 실학사상가로는 역사의 안정복(安鼎福), 지리의 이중환(李重煥)·윤동규(尹東奎)·정상기(鄭尙驥), 산학의 신후담(愼後膽) 등을 들 수 있다. 정약용(鄭若鏞)과 우하영(禹夏永) 등도 이익의 실학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에는 또 실학파인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되었다. 북학파에 속하는 실학사상가로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을 들 수 있다.
성호학파의 특성은 농업개혁과 토지개혁을 매우 중시하고 제도개혁을 강조한 점이다. 이에 비해 북학파의 특성은 대부분이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북방에 전파된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배워 도입하려 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한 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 뒤 두 학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사상에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 밖에도 18세기의 실학사상가로는 유수원(柳壽垣), 신경준(申景濬), 이긍익, 한치윤(韓致奫), 위백규(魏伯珪), 이종휘(李鍾徽), 성해응(成海應), 유희(柳僖) 등이 있었다.
이익은 당시 양반부호에 의한 토지겸병의 폐해를 통감하고 토지 소유의 하한을 영업전(永業田)으로 정하여 이를 매매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의 토지는 자유 매매를 허락함으로써 일정기간이 지나면 농민의 영락(零落)을 방지하면서 토지겸병을 막을 수 있는 한전제(限田制)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익은 또한 놀고 먹는 양반이 많아서 나라가 빈곤하게 됨을 개탄하고, 양반도 농업에 종사하게 하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하였다. 노비제도도 세습제를 폐지하고 매매를 금지하며, 소유 상한을 100명으로 우선 제한했다가 당대가 지나면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문벌제도와 서얼차별제도도 폐지할 것을 주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붕당(朋黨)이 형성되고 당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제한된 관직 수에 비해 과거의 합격자 수가 너무 많은 데 있다고 지적하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선비들이 우리 나라 역사는 읽지 않고 중국사만 읽는 폐단을 통탄하고, 과거시험 과목에 우리 나라 역사를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한편, 홍대용은 화이사상(華夷思想)의 가장 견고한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던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과 지정천동설(地靜天動說)을 지원설(地圓說)과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로 비판하면서, 중국만이 세상의 중심인 정계(正界)가 아니라 조선도 서양도 모두 정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나라, 사람, 습속, 군왕이 중국이나 다른 나라나 모두 차별이 없는 균등한 것임을 논증하여 화이사상을 무너뜨리고, 조선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정립하였다.
홍대용은 또한 사민(士·農·工·商)의 세습제도를 반대하고, 사민의 본질적 평등을 주장했으며, 사민개학(四民皆學)을 주창하였다.
그는 면 수준까지 전국의 행정단위 구역에 학교를 하나씩 설립하여 사민의 자제들을 모두 공부시켜서, 그 중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인재 본위로 관직에 임명할 것을 제안했으며, 교과목은 효·제·충·신과 함께 서(書)·산(算)·농·상·무예·병(兵) 등 실용지학을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매 장정마다 토지 2결을 분배하는 토지개혁의 기초 위에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철저히 실시하고, 그때까지 병역을 지지 않던 양반·관료(郎廳 이하)·아전·노비들에게도 모두 병역의 의무를 갖게 하는 등 만민개병(萬民皆兵)을 실시해서 100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제안하였다.
박지원은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에서 토지겸병과 지주제도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가호별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하는 한전제의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또 『과농소초 課農小抄』에서는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영농방법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수리관개시설의 확장 등을 상세히 연구하여 주장했고, 서울 근교에 모범농장을 설치하여 농사기술을 보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비생산적인 양반 신분을 풍자 비판하고, 서얼차별제도와 시노비(寺奴婢) 폐지 등 신분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선박을 이용한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차제(車制)를 이용한 교통, 은화 주조를 비롯한 화폐제도의 정비를 제안했으며, 상업과 공업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농·상·공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랑캐라 하여 거부하지 말고, 북방 청나라의 선진 과학기술과 생산기술을 배워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박제가는 『북학의 北學議』에서 특히 그때까지 상업을 천시해 오던 사상과 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자유로운 상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산업발전의 요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로운 상업이 발전하면 그에 따라서 농업과 수공업도 더욱 발전하게 된다고 보고, 비생산적 양반들을 상업에 종사하게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차(車)를 사용하는 교통·운수의 발전을 주장하였다. 즉, 차를 사용하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고, 시장이 확대되면 생산물의 수요가 증대되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농업과 수공업이 다 같이 발전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국내상업뿐만 아니라 대외무역도 크게 벌여 처음은 중국과, 다음은 안남(安南)·류큐(琉球)·대만(臺灣) 등 모든 외국과 활발하게 통상무역을 하는 것이 국가이익을 증대시키고 선진기술을 도입하며, 고루한 관습을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대외무역에서도 수출을 강조하고, 은의 해외 유출과 중국상품의 수입은 규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상주의적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제가는 이 밖에도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서 병력수만 증대시킬 것이 아니라, 우수한 무기를 발달시키고 말을 잘 기르며 수레를 발전시키고 군사훈련을 철저히 강화하는 정병주의를 주창했으며, 이러한 정병 7만∼8만 명만 얻을 수 있으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성행하던 풍수지리설과 산송(山訟)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하고, 대책으로 공동묘지제도를 제안하였다.
유수원은 그의 『우서 迂書』에서 사·농·공·상의 사민 평등을 주장하고, 사민이 모두 신분의 장애 없이 배우고 능력과 선택에 따라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민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상인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상인이 있으면 자연히 장공인(匠工人)이 있으며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통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상인 자본의 결집과 합자에 의한 동업조합 또는 합자체 상업의 발전을 강조하고, 양반도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하영은 그의 『천일록 千一錄』에서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권농관(雚農使) 설치, 권농절목의 마련, 농가요무의 편찬과 보급, 지방 수령의 권농실적에 대한 고과, 수차(水車)의 보급과 관개시설의 발전, 농지의 확장, 백지징세(白地徵稅)의 엄금, 농업재해 대책의 합리화 등을 제안하였다.
그는 또한 평시서(平市署)를 폐지하고 상업의 보다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했으며, 상인자본(물주)이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광업발전의 촉진을 적극 주장하였다.
실학의 사회사상은 19세기 초엽에 들어와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세기 초엽의 실학사상가로는 정약용·김정희(金正喜)·서유구(徐有榘)·김정호(金正浩)·이규경(李圭景)·최한기(崔漢綺)·유신환(兪莘煥)·최성환(崔瑆煥)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약용·이규경·최한기를 이 시대의 대표적 실학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정약용은 17세기 이래의 실학을 그의 방대한 저작집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에서 집대성하였다. 또한 「원목 原牧」이나 「탕론 湯論」에서 태고에는 백성만 있었을 뿐 통치자는 없었는데, 백성들의 생활상 필요하다고 합의하여 아래로부터 백성들의 자발적인 추대에 의해 수령·국왕·천자를 추대했는바 이것이 순리이며, 따라서 백성들은 수령·국왕·천자를 당연히 교체하고 개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신민본사상(新民本思想)을 전개하였다.
그는 국왕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강조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천자천명설이나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천자중민추대설(天子衆民推戴說)과 왕권중민추대설(王權衆民推戴說)을 주장했으며, 군주세습제를 부정하고 백성의 군주교체권 및 군주개선권을 승인한 사실에서 그의 신민본사상이 가지고 있는 민주사상의 맹아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은 또한 당시의 사회신분제도·문벌제도·지방차별제도·적서차별제도·당파차별제도 등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분차별 등 각종 차별제도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기 때문에, 우수한 인재의 8, 9할을 버리고 있다고 통탄하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당시 지방관(감사·수령)과 향리들이 농민을 수탈하는 것을 먹이를 찾는 굶주린 호랑이와 솔개에 비유하고, 향리를 작은 도둑, 감사를 큰 도둑이라고 비판하면서, 『목민심서』에서 지방행정에 관한 개혁안을 상세히 제시하였다.
또한 토지겸병·지주제도의 폐해와 농민이 착취당함으로써 겪는 빈곤을 통탄하고, 「전론 田論」에서는 여전제(閭田制) 토지개혁안, 『경세유표 經世遺表』에서는 정전제(井田制)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여전제 토지개혁안은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하에, 약 30호의 마을 단위로 토지 소유를 공유로 하여 공동경작, 공동수확한 다음 가족별 투하 노동량에 의거하여 분배한다는 방안이었다.
그는 이 여전제 토지개혁에 의하여 지주제도를 철저히 폐지하고 놀고 먹는 양반사족을 농업생산이나 농업기술 연구에 종사하게 하여, 농촌문제를 해결하고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삼정(전세·환곡·군포세)의 개혁을 추구하여 전세를 대폭적으로 절하하고 잡세를 없앴으며, 환곡제도를 크게 개혁하고 군포법을 호포법(戶布法)으로 개혁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상공업도 중시하여 금속화폐 주조와 조세의 금납화를 주장했으며, 수공업 발전과 이용후생을 위해서는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채용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중앙관서로 이용감(利用監)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민보의 民堡議」에서 백성들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민보의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모든 주민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자기 고을에 보루를 쌓고 16∼55세의 남자는 정병(正兵)이 되고 부녀자와 노인, 어린이는 보급을 담당하여, 보장(堡長)의 지휘하에 관군과 협동하는 민간방위 조직을 편성해서, 외적의 침략을 백성들의 힘으로 막아내고 나라와 자기 고을을 방위한다는 방안이었다.
한편, 이규경은 우리 나라의 훈민정음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고 설명하고 훈민정음 연구와 그 보급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국사(國史)를 새로이 자주적으로 체계화하여 전사(全史)를 편찬, 보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토지리에 대한 연구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조사하여 적극 개발하고, 선진적 제련기술을 도입하여 제련공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 당시의 쇄국정책을 비판하고 외국과의 개국 통상을 주장했으며, 서남쪽의 여러 나라들과 개국 통상하여 무역을 진행하고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 채용하는 것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최한기는 사민평등을 주장하고 인재등용 문제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기본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인재의 개념을 그때까지 실학사상가들처럼 정치행정가에 국한시키지 않고 과학기술과 산업 실무의 인재로 확대·발전시켜 그 양성과 선발방법을 제안하였다.
또한 전제군주 한 사람의 통치는 옛날 제도라고 지적하면서, 국민들이 인재를 함께 선거하는 공선(公選)과 국민의 여론인 공론(公論)에 의한 인재 평가, 그리고 온 나라의 국민이 함께 하는 공치(公治)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민주주의 초기적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부유한 양반관료들이 국민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고 빈곤한 국민들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면서 박애와 인도주의를 강조하였다.
또 교육에도 신분에 구애받지 말고 실용성 있는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여, 특히 서민교육·과학기술교육·실업교육·직업교육을 주창하였다.
최한기는 박제가·이규경을 이어 가장 적극적인 개국통상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당시의 쇄국정책을 자기 나라의 앞길을 좁히고 망치는 길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서는 외국과 개국통상(開國通商)하여 그 나라의 발전된 기계·기술산업·교육 등을 우리의 것과 비교해서 취사선택한 다음 활발한 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현재 세계 여러 나라들이 내왕하는 세계정세하에서는 마땅히
변(變)주 02)으로써 변을 막을 수 있지 불변(不變)으로써 변을 막을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개국한 뒤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발달된 외국의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양의 화력과 수력 이용기술, 증기기관, 방직기계 등을 적극 도입할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서양 서적과 법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인도(人道)’를 존중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과학기술을 상호 지원하여 공동의 번영을 이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세계공통어도 만들고 동양의 인의(仁義)에 관한 도덕과 서양의 과학기술 학문을 결합시켜 세계적 종교로 만들어서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이룩하자는 구상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와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여 농업과 임업과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와 방안을 내놓았다.
김정호는 30년간 전국 각지를 답사하고 연구한 성과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1861년에 완성하였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1864)를 출판하여 우리 나라의 산업지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실학의 사회사상은 19세기 초엽에 들어와 근대 지향성을 명확히 보이며, 이규경과 최한기에 이르면서 개국통상을 실현하고 시민사회를 성립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