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9월에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이후 정부는 국왕의 윤허를 받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 각기 소모사를 임명하여 민보군(民堡軍)을 규합하려 하였다. 당시 고종 정부는 각 군현의 사정에 따라 소모사, 소모관, 토포사, 조방장 등을 임명하였다. 민보군은 소모사와 토포사 등의 지휘 통제 아래 활동하였다.
당시 소모사는 지역 내의 유력한 양반들에게서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소모사 산하의 소모영(召募營)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기구로 3남의 요충지에 설치되었는데, 양반과 향리층이 연합하는 형태로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소모관을 비롯한 고위 간부는 경내의 양반들이 차지하였고 민보군은 향리층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양자 간에는 군사권을 둘러싼 갈등도 심각하였다. 소모관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 이후에는 대규모의 연합의병장 휘하의 의병장으로 역할하였다. 당시 의병장들은 국왕에게서 의병소모권을 부여받은 소모사처럼 행동하면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봉기한 인사를 소모관에 임명하여 의진(義陣)에 편입시키거나 혹은 자질이 우수한 인사를 이에 임명하여 의병 모집을 전담시켰다.
소모관은 이후 후기 의병 시기까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