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관 ()

근대사
제도
군사 또는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
제도/관직
소속
소모사(召募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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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소모관(召募官)은 군사 또는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이다. 민란 등에 대응하기 위하여 해당 지방의 민병대를 임시로 지휘하던 소모사(召募使) 예하의 직책으로, 지역주민을 모으고 적정을 탐지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고종 대인 1894~1895년에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체포 및 처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의병을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정의
군사 또는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
설치 목적

조선시대에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을 진압하기 위한 향병을 지휘하던 중간 간부로, 지역민을 모아 향병을 조직하여 적정을 탐지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1894~1895년에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동학농민군을 진압 · 체포하고 처형하였으며, 을미사변 이후에는 의병을 모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주 지역 소모사로 임명된 정의묵이 1894년 10월부터 1895년 1월까지 매일 일어난 사건을 소모일기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임무와 직능

1894년 9월에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이후 정부는 국왕의 윤허를 받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 각기 소모사를 임명하여 민보군(民堡軍)을 규합하려 하였다. 당시 고종 정부는 각 군현의 사정에 따라 소모사, 소모관, 토포사, 조방장 등을 임명하였다. 민보군은 소모사와 토포사 등의 지휘 통제 아래 활동하였다.

당시 소모사는 지역 내의 유력한 양반들에게서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소모사 산하의 소모영(召募營)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기구로 3남의 요충지에 설치되었는데, 양반과 향리층이 연합하는 형태로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소모관을 비롯한 고위 간부는 경내의 양반들이 차지하였고 민보군은 향리층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양자 간에는 군사권을 둘러싼 갈등도 심각하였다. 소모관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 이후에는 대규모의 연합의병장 휘하의 의병장으로 역할하였다. 당시 의병장들은 국왕에게서 의병소모권을 부여받은 소모사처럼 행동하면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봉기한 인사를 소모관에 임명하여 의진(義陣)에 편입시키거나 혹은 자질이 우수한 인사를 이에 임명하여 의병 모집을 전담시켰다.

변천사항

소모관은 이후 후기 의병 시기까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갑오실기(甲午實記)』
『김하락진중일기(金河洛陣中日記)』
『소모사실(召募事實)』

단행본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선인, 2007)

논문

신영우,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세력의 대응: 예천 · 상주 김산의 사례를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집필자
조재곤(서강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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