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장연, 송화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장연, 송화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 중서부에 위치한 군.
정의
황해도 중서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으로는 신천군·벽성군, 서쪽으로는 황해, 서남쪽으로는 장연군, 북쪽으로는 은율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4°45′∼125°23′, 북위 38°12′∼38°42′에 위치하며, 면적 723.26㎢, 인구 8만 7648명(1944년 현재)이다. 13개 면 115개 이가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송화면 읍내리이다.

자연환경

지형은 서북 동남 방향으로 길다. 서북 방향의 산줄기가 군내를 달리고 있는데, 동쪽의 신천군 및 벽성군과의 경계에는 5,600m의 높은 멸악산맥이 연속되어 있어 운계산(雲鷄山, 487m)·달마산(達磨山, 596m)·팔봉산(八峰山, 481m) 등이 군계를 이룬다.

남쪽의 장연군과의 경계에는 박석산(礴石山, 596m)·건지산(乾支山, 387m)·원통산(遠通山, 339m) 등이 있고, 북쪽의 은율군과의 경계에도 구왕산(救王山, 458m)·묵산(墨山, 656m)·월개산(月蓋山, 505m)·취봉(鷲峰, 439m) 등이 연속되어 있다.

서해안은 장산곶 북쪽에서 광량만 남쪽에 이르는 긴 해안선을 안고 있으며, 연안에 초도(椒島)·석도(席島)·접도(蝶島) 등의 섬이 있다. 하천으로는 묵산과 박석산을 연결하는 분수령의 앞으로는 산내천(山內川)이, 뒤로는 남대천(南大川)이 각각 서쪽으로 흘러 서해에 유입되면서 유역에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어천(魚川)은 군의 동남단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장연군으로 들어가 남대천에 합류하며, 남천(南川)은 군의 서부 중앙을, 구왕천은 군의 동북 경계를 각각 지나면서 주변에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지질은 고생대 조선계이다.

바다에 접해 있고 뒤로는 구월산 연봉을 지고 있어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혹서가 드물고, 겨울에는 서북풍이 강하게 불고 비와 눈은 비교적 많이 내린다. 연평균 기온 10.5℃, 1월 평균 기온 -6.1℃, 8월 평균 기온 25.3℃이며, 연 강수량은 700∼800㎜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으나, 진풍면 덕안리에서 신석기 시대 유물로 마제석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발굴되었다. 송화면에서도 유구석부·반월도 등 청동기 시대 석기가 발굴되어 선사 시대에 사람이 생활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구을현(仇乙縣)과 같이 마경이(麻耕伊)·판마관(板麻串)·웅한이(熊閑伊)라는 작은 고을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그 영토로 편입되었다.

구을현은 ‘굴천(屈遷)’이라고도 하였는데 757년(경덕왕 16)에 굴현(屈峴)으로 개칭되어 마경이·판마관·웅한이 등과 함께 양악군(지금의 안악군)에 소속되었다.

[고 려]

굴현은 태봉 때에 왕건 세력이 궁예에게 협력함으로써 그 판도 안에 편입되어 풍주(豐州)로 개칭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가 건국한 뒤 마경이는 청송현(靑松縣), 판마관은 가화현(嘉禾縣), 웅한이는 영녕현(永寧縣)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시기는 10세기 말로 추측된다.

풍주는 995년(성종 14) 도호부로 되었다가 1018년(현종 9) 군으로 강등되어 방어사가 부임하는 군사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또한, 풍주는 서해도의 계수관(界首官)으로서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여 가화현·청송현·영녕현은 물론이고 안악군·유주현·은율현 등이 속군·속현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가화현과 청송현이 속현의 지위에서 벗어난 것은 1106년(예종 1)에 감무가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이후 영녕현은 신천현의 속현이 되었다.

서해도 서부 지역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던 풍주는 또 조운(漕運)을 위한 서하군포(西河郡浦)가 있어서 물산의 집결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몽고군이나,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자주 화를 입었으며, 왜구도 여러 차례 침입한 바 있다.

주촌리에서는 11세기의 청자 도요지가 여덟 곳이나 발견되어 고려청자 문화의 한 중심지이기도 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조 선]

1396년(태조 5)영녕현이 가화현의 직촌으로 개편된 뒤 1408년(태종 8) 청송현과 가화현이 병합되어 송화현이 되었다. 이때의 지명이 현재에 이른다.

풍주는 1397년 진이 설치되어 지주사(知州事)를 겸하는 병마사가 부임하였고, 1406년 병마도절제사가 부임하여 풍해도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1413년 규례에 따라 ‘주’자를 ‘천’자로 고쳐 풍천이 되었고, 1423년(세종 5) 병마도절제사가 첨절제사로 대체되었으며, 『경국대전』에도 항상 상비군이 배치되어 있는 요충지로 규정되어 있다.

풍천은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외향인 연유로 1469년(예종 1) 도호부로 승격되어 계속 황해도 서북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기능을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총 1,024호, 2,937명이었고 풍천보다 송화의 인구가 월등히 많았으나, 1759년(영조 35)에는 모두 16방 39리로 편성되어 6,910호, 3만 1644명으로 증가된 가운데 풍천의 인구가 약 56%를 차지하게 되었다.

[근 대]

1895년송화군과 풍천군으로 개편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천군이 송화군에 편입되는 한편, 동부 지역 일부가 장연군과 신천군에 이속되어 현재의 송화군으로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3월 12일부터 4월 11일까지 송화읍, 옛 풍천읍 등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 일제의 헌병·경찰 등과 충돌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신민회 등을 통하여 활동하다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군무총장·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盧伯麟), 〈독립선언문〉을 국내에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던 김마리아, 1928년 5월 대만에서 일본 황족을 습격한 조명하(趙明河), 광복군 대대장으로 활약한 한철수(韓哲洙) 등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1935년 당시 13개 면, 115개 이로 편성되었고, 인구는 1942년에 총 1만 5403호, 8만 3947명이었다.

유물·유적

예로부터 홍건적과 왜구의 침범이 빈번하여, 해안선 요소에 성을 쌓아 방비하였는데 그 성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옛 풍천읍 뒤의 서린봉에는 풍천군 시절에 쌓았던 성곽의 일부분인 풍천성지가 남아 있다.

지금도 옛 풍천읍 뒤의 서린봉 줄기를 따라 견고하게 쌓은 성곽을 볼 수 있고, 암벽 위의 성이 남아 있는 곳을 ‘성낭’이라고 부른다. 성 위에는 망원루(望遠樓)라는 누대가 있었다.

1426년(세종 8)에 성기간심사(城基看審使)로 풍천성을 답사한 박곤(朴坤)의 장계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흙과 돌로 쌓은 것이 약 760m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성안이 비좁고 지면이 평탄하지 못하여 유사시에 많은 주민이 피난할 수 없으므로, 남쪽으로 약 190m를 더 쌓아야 물도 넉넉하고 관민이 모두 들어갈 수 있으며 신·구성을 다 돌로 쌓아야 된다고 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1486년(성종 17)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풍천도호부 성곽조에 둘레는 약 518m의 석축의 성이 있고 나머지 삼면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채로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박곤의 계획이 실천되지 못한 것 같다.

한편, 풍천에는 이 읍성 이외에도 서쪽 해안으로 흙벽돌과 흙을 섞어 쌓은 약 3.3㎞의 고행성(古行城)이 있었다고 한다.

운유면 당관리에는 옛날 우리 나라와 중국 사절들이 유숙하던 ‘당관(唐舘)’의 옛터가 있다. 옛 풍천군의 읍치였던 풍천은 중국의 산둥반도 및 랴오둥반도와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관계로 중국을 오가는 사절들이 풍천의 바닷길을 많이 이용하였다.

송화면에는 송화현의 현청 가화관(嘉禾館)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유명했던 건물로 조경헌(照鏡軒)이 남아 있다. 이곳은 현감을 중심으로 고을명사들이 교유하던 곳이다.

옛 송화읍에는 ‘송화8정’으로 유명하였던 와룡정·무학정·관어정·도암정·약선정 등이 남아 있으며, 동교동에는 송화향교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도원면 탑평리에 고려 때 가화현청이던 고현지(古縣址)가 있다.

연방면 명례리 백운동에는 송화군 강학장의 효시인 도동서원이 있고, 도원면 군산리 삼봉동에는 문익점(文益漸)의 초상을 봉안한 삼봉서원(三峰書院)이 있다. 장양면 자양리에는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한 자양서원(紫陽書院)이 있다.

불교 문화재로는 박석산에 운암사·임한사 등의 고찰이 있다. 또, 약산의 동쪽인 상리면 화천리에 화장사지가, 서쪽의 하리면 청량리에 청량사지(淸凉寺址)가 있다.

이 절들의 창건 연대는 상당히 오래전이고 절터의 규모로 보아 크게 번창하였던 절이 분명하다. 화장사가 있던 곳에는 아직 12층석탑이 솟아 있는데, 탑의 우아한 제작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되며, 인근 주민들이 이 석탑에 와서 기우·기복을 하여 영험을 얻었다고 한다.

청량사는 고려 시대의 고찰로 청량사의 종은 새벽마다 은은하고 맑게 울려 펴져 승려뿐 아니라 세속 인간의 마음도 맑게 했다 하여 ‘풍천팔경’ 중 ‘청량효종(淸凉曉鐘)’으로 알려져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었으며, 한말에는 삼봉서원·자양서원 등이 있었다. 연방면 명례리 백운동에 있는 도동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되었으며, 주희(朱熹)·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을 봉사하였다. 삼봉서원은 도원면 군산리 삼봉동에 있으며, 문익점을 봉사하였다.

자양서원은 자양면 자양리의 정씨(鄭氏) 일문에 의하여 1900년경 건립된 것으로, 정몽주의 진영을 봉안한 포은영당(圃隱影堂)과 정씨 문중 및 인근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자양서사(紫陽書社)를 합하여 통칭하는 것이다. 그밖에 송화면 용정리수증사 경내에 양기(楊起)의 초상을 봉안한 충헌영당(忠獻影堂)이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풍천기독교장로회에서 설립한 풍천양재학교(豐川養材學校), 1910년 노백린이 설립한 풍해면의 풍천광무학당(豐川光武學堂), 1919년 독지가 하준(河駿)이 진풍면 덕정리에 설립한 덕정학교(德井學校) 등이 있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일제 강점기 말기에 모두 폐교되거나 보통학교에 흡수되었다. 이 밖에 상리면 도은리 전도동에 서당 대신 유도학교(儒道學校)가 세워졌다.

송화군 내에는 중등교육기관이 없어 풍천중학교 설립을 위하여 기성회가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1945년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가 있으며, 종교 상황은 현재 불교 사찰 2개, 천주교 성당 2개, 개신교 교회 17개가 있다.

사회단체로는 1925년 조직된 금연금주계가 있는데, 풍해면 성상리·성하리 주민을 중심으로 금연·금주를 목적으로 결성된 계이다.

이 계는 1906년부터 정부의 일본에 대한 외채가 1300만 원에 이르자 전국 각처에서 담배를 끊고 그 돈을 절약하여 빚을 갚자는 취지 아래 끽연금지회를 조직하여 보채운동(報債運動)을 벌인 것과 비슷한 성격의 지역적 군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25년 노영진(盧榮振)을 계장으로 약 80명의 발기인이 모여 발족한 이 계는 점차 발전하여 1930년에는 조종복(趙鍾福)을 중심으로 계 조직인 대동조합(大同組合)을 만들어 1인당 불입금 1원으로 하여 공동 구매 사업을 전개하였다. 대동조합은 서민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협동조합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산업·교통

이 군은 400∼500m의 구릉지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이므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활발하다. 총 농경지는 213.7㎢로 경지율은 29%이며, 그중 논이 47.7㎢로 18%이고, 밭이 166㎢로 82%를 차지한다.

남대천·구왕천·어천 주변은 관개시설이 잘되어 쌀 생산이 많으며, 주요 농산물로는 보리·콩·조 등이 있다. 그 중 운유면·율리면에서 생산되는 조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구릉지에서 사과·배 등의 과일이 많이 나며, 면화의 생산도 많다.

수산업으로는 초도 부근이 까나리(멸치의 일종)의 황금 어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4∼5월에 연안에서 잡히는 꼴뚜기는 송화군의 명물이다. 그 밖에 복·갈치·민어·새우·참조기 등이 어획된다.

광업으로 장양면의 모나지(중석)광산, 오봉산광산, 진풍면 덕정리의 사금광이 있다. 풍해면 성하리에 사과 오가리 공장이 있고, 장양면에 도자기 공장이 있다.

상업 활동은 주로 5일 정기장에서 이루어진다. 송화·풍천·석탄·사기리(사꼴장)·수교(무더리장)·장양·산내·온천·탑골 등 9개의 정기 시장이 있으며, 그중 풍해면 성상리의 풍천장과 동부의 교통의 요지인 봉래면 수교장, 농산물의 집산지인 송화장 등이 대표적인 중심시장이며, 특히 송화장의 거래가 가장 많다.

교통은 1937년 개통된 사리원∼장연 간의 황해선이 군의 동남부를 지난다. 도로는 은율-송화-장연을 잇는 2등도로가 군을 남북으로 지나고, 진강포와 온수리를 잇는 3등도로가 군의 중앙을 지나며, 신천∼장연 간의 3등도로가 남부를 가로지른다.

해운으로는 진강포·용수포·담방포·소사포 등이 어항으로서만이 아니라 해상 운수의 항구로서 큰 역할을 하며 특히 풍해면 진강포와 초도 소사포(蘇沙浦) 사이에는 매일 배가 운항되며, 초도와 석도에 등대가 있다.

송화면·상리면·하리면 사이에는 약산이 있고, 하리면 오정리에는 물맛이 좋은 오정(五井)과, 하리면 일대에 냉천이 있다. 송화면 용정리에는 샘물이 맑고 차며 만병통치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용정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읍·면

[도원면桃源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탑평리이다. 삼국 시대에는 탑평리에 판마관이라는 고을이 있었으며, 이를 940년(고려 태조 23)에 가화현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현종 9)에 풍천에 속하였다가 1408년(태종 8)에 청송현과 합하여 송화현이 되었다. 1909년 면의 일부를 장연군에 이속하였다.

면의 동부에 박석산의 맥에 속하는 팔봉산, 중앙부에 원통산 등이 솟아 동반부는 산지이지만, 서반부는 대체로 100m 내외의 화강암질의 구릉 지대이다.

면의 북부에 남대천의 지류인 어천이 동서로 흘러 그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전개된다. 서반부의 구릉 지대 및 어천 유역이 이 면의 주요 생산, 거주 지역이 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잎담배·조 등이다. 부업으로 기직(機織)에 의한 마포(麻布)·명주 등을 생산한다. 교통은 탑평리를 중심으로 각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유적지로는 탑평리에 고려 시대의 가화현치(嘉禾縣治)의 유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탑평(塔坪)·가화(佳禾)·산현(山峴)·화계(花溪)·공세(公稅)·동촌(東村)·도암(道巖)·군산(群山)·매계(梅溪) 등 9개 이가 있다.

[봉래면蓬萊面]

군의 중앙 남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수교리이다. 면의 동남단을 곡류하는 남대천의 지류 어천과 면의 북부를 지나는 남대천 사이에 평야 지역이 발달되어 있다.

면내는 100m 내외의 구릉이 곳곳에 있지만 대체로 평야 지대이며,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비교적 잘되어 각종 농산물의 경작에 적합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보리·왕골 등이다. 남대천의 지류 연안에서 사금이 산출된다. 교통은 연방면과의 경계를 따라 철도 황해선이 달리고 있어 수교역이 설치되어 있다. 수교역은 비록 작지만, 연정·연방·봉래 등 3면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한다.

면의 중부로는 해주∼송화 간의 3등도로가 서북단에서 동남으로 통하고 있고, 이 밖에 각 마을에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있어 편리한 편이지만 다만 동부의 구릉 지대는 대단히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수교(水橋)·능동(陵洞)·산천(山泉)·앵가(鶯柯)·석교(石橋)·득성(得聖)·내괴(內槐)·수이(水耳) 등 8개 이가 있다.

[상리면上里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도은리이다. 본래 풍천군 지역이었으나 1909년에 풍천군이 송화군에 합병되면서 송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동남단에 월개산, 동북단에 구왕산이 솟아,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 내려 곳곳에 작은 구릉이 있다.

이 동남부의 산지에 비하여 서부는 대체로 평야 지대이다. 특히, 동남부에서 발원하는 남천이 평야의 남부를 서류하고 하천 유역의 토지가 비옥하여 농작물의 경작에 적합하다.

쌀·콩·보리·조·대마 등이 주요 농산물이며, 과수 재배를 하는 농가도 많다. 구왕산에는 여러 곳에 금·은 광산이 있으나 가동률이 일정하지 않다.

교통은 풍산∼은율군 남부면 간의 3등도로가 남천을 따라 면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으며, 이 도로에서 북쪽의 여러 지역에 이르는 등외도로가 있으나 대체로 불편한 편이다.

명승고적으로는 약산에 약재가 많이 나며, 화천리에 화장사지가 있고 그 경내에는 12층석탑이 아직도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도은(道隱)·화천(華川)·철관(喆舘)·신평(薪坪)·와룡(臥龍) 등 5개 이가 있다.

[송화면松禾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읍내리이다. 면의 동북단에 묵산, 서부에 취봉, 북단에 월개산이 솟아 그 여세로 면의 전역에 미쳐 곳곳에 구릉이 있다. 묵산은 일명 수증산(修證山) 또는 수증산(壽增山)이라고도 하며, 송화면의 진산이다.

여러 구릉 사이를 면의 동쪽에서는 위양천(謂陽川), 서쪽에서는 생왕천(生旺川)이 각각 남류하여 남대천에 합치는데, 이들 하천 유역에 적은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콩·보리·조·메밀 등이다. 약산리는 수목이 울창하여 제재에 적합한 조선송(朝鮮松)이 많이 채벌된다. 광업으로는 생왕리 금광에서 금·은 등이 채굴된다.

도로는 읍내리에서 장연∼은율 간의 2등도로와 해주∼풍산 간의 3등도로가 교차되고, 등외도로가 주요 마을에 연결되어서 교통은 편리하다. 명승지로는 용정리에 용정냉천이 있고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증사(修證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읍내(邑內)·부왕(富旺)·무당(茂堂)·옥현(玉峴)·용호(龍虎)·홍암(鴻巖)·화당(禾堂)·선암(仙巖)·생왕(生旺)·약산(藥山)·용정(龍井) 등 11개 이가 있다.

[연방면蓮芳面]

군의 중동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구탄리이다. 면의 동단과 서단에 100m 내외의 구릉이 연이었고 그 사이를 위양천과 모령천(茅寧川)이 남북으로 흘러 남대천에 합류한다.

남대천의 본류는 남쪽의 봉래면과의 경계를 서쪽으로 흘러 장연군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서 농작물의 경작에 적당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콩·팥·보리·조·잎담배 등이다. 일부 농가에서는 부업으로 양잠과 기직(機織)에 의한 명주와 마포 생산을 한다.

교통은 철도선 황해선이 사리원역에서 분리하여 남부면 경계를 지나며, 수교역에서 송화읍 내에 이르는 3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통과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명례리 백운동에 도동서원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구탄(九灘)·백화(白華)·명례(明禮)·마산(馬山)·다암(多巖)·방림(芳林)·청사(靑沙)·관천(冠川)·연교(鷰郊) 등 9개 이가 있다.

[연정면蓮井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온수리이다. 면의 북부에 높이 322m의 산도 있지만, 면 전역에는 대체로 100m 내외의 구릉이 각처에 있고, 그 사이를 남대천과 생왕천이 흐르면서 하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하천 유역과 더불어 구릉 사면도 잘 개간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잎담배 등이다. 농가 부업으로 기직(機織)에 종사하여 마포·명주 등을 산출한다. 남부 산지에는 금·은 등을 채굴하는 소규모의 광산이 있다.

철도는 황해선이 면의 중앙부를 동서로 횡단하고 송화온천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서부에 송화∼장연 간의 2등도로가 지나며, 동부에는 장연∼수교역을 잇는 3등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온수리에 송화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은 45℃의 유산염천(硫酸塩泉)으로서 수량이 넉넉하다. 유적으로는 부산리에는 성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구탄(九灘)·백화(白華)·명례(明禮)·마산(馬山)·다암(多巖)·방림(芳林)·청사(靑沙)·관천(冠川)·두죽(杜竹) 등 11개 이가 있다.

[운유면雲遊面]

군의 최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사기리이다. 본래 풍천군 지역이었으나 1909년에 풍천군이 송화군에 합병되면서 이 군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남단에 건지산이 솟아 그 여맥이 동서로 뻗어 내려 남부는 대체로 산지이다. 중부는 풍장산(楓長山, 329m)을 제외하면 거의 평지로 되어 있으며, 특히 면의 중앙을 서류하며 가로지르는 산내천의 북안은 기름진 넓은 평야로 전개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팥·보리 등이며, 그중 조는 품질이 좋아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진상품이 되었다. 도로는 사기리를 기점으로 각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연락될 뿐, 교통은 대체로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간촌리의 동경대에 윤기남(尹起南)의 송덕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사기(沙器)·당관(唐舘)·당산(堂山)·조항(鳥項)·간촌(間村)·서의(西儀)·다천(多川)·송학(松鶴)·용수(龍首)·송곡(松谷)·송현(松峴) 등 11개 이가 있다.

[율리면栗里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세진리이다. 본래 풍천군 지역이었으나 1909년에 풍천군이 송화군과 합병되면서 이 군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동남단에 박석산이 높이 솟아, 그 여맥이 면 전역에 미치므로 남부는 산악 지대가 되지만 동북쪽으로 경사되어 말단은 평지를 형성한다. 풍해천이라고도 하는 남천이 면의 동부를, 서부는 산내천이 각각 북서쪽으로 흘러, 그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메밀·잎담배 등이다. 특히 조는 품질이 좋아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진상되었다. 도로는 세진리를 기점으로 각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개통되었지만 교통은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세진(細眞)·대촌(大村)·신촌(新村)·월현(月峴)·대밀(大密)·보덕(保德)·당잠(唐岑) 등 7개 이가 있다.

[장양면長陽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애천리이다. 삼국 시대에는 연산리에 마경이라는 고을이 있었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청송현(靑松縣)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풍천에 속하였다가 1408년(태조 8)에 송화현에 속하게 되었고, 1895년 송화군에 속하였다.

면의 동남단 군의 경계에 달마산과 작산이 솟아 서북으로 경사되어 있고, 북쪽에는 운계산 등의 구릉이 연달아 있다. 산지와 구릉 사이를 어천(魚川)이 서쪽으로 흘러 하천의 하류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농작물 경작에 적당하여 이 면의 주요 생산 지대가 된다. 특히, 장양수리조합의 관개시설이 개선된 뒤 농작물의 생산량이 급증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조·콩·과일 등이다. 연산리에서 중석이 다량 산출되며, 면내 각지에서 고령토가 산출되어, 이를 재료로 한 도자기 공장이 면내에 있다. 도로는 애천리를 중심으로 해주·송화·신천 등의 각 방면에 3등도로가 통하고,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철도는 북부 신천군 내를 통과하는 황해선의 야촌이나 용문역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양리에 정몽주(鄭夢周)를 봉사하는 자양서원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애천(艾川)·평촌(坪村)·전산(錢山)·주련(珠連)·학령(鶴嶺)·동자(童子)·자양(紫陽)·순막(筍幕)·억소(億沼)·모정(茅井)·효촌(孝村)·괴원(槐院)·연산(蓮山) 등 13개 이가 있다.

[진풍면眞風面]

군의 최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학계리이다. 본래 풍천군 지역이었으나 1909년에 풍천군과 함께 송화군에 합병되었다.

면의 중부 동쪽에 원주산(遠周山, 291m)이 솟아 있는데 그 지맥이 서북으로 뻗어 내려 말단은 비파곶(琵琶串)이 된다. 원주산맥은 이 면을 서남 사면(西南斜面)과 동북 사면(東北斜面)으로 나눈다.

동북 사면은 은율군까지 계속되며 완경사이므로 논을 전개시키고, 서남 사면은 작은 구릉이 기복되어 밭으로 이용된다. 북방 해상 약 3㎞ 지점에 최고봉 116m의 석도가 있다.

남북이 길고 산지가 많지만, 인력으로 개간한 전답이 넓어 주민들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생활을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 등이며, 수산물은 조기·새우·조개류가 많이 어획, 채취된다. 태을리 해안에 천일염전이 있다. 덕정리의 작은 하천에서는 사금이 많이 나온다.

도로는 학계리 중심의 등외도로가 여러 주요 마을에 연결되고 있으나 교통은 불편하다. 덕정리 앞바다에서 솟는 냉천이 질병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리에 진주 하씨(晉州河氏), 내안리에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학계(鶴溪)·덕안(德安)·수산(修山)·태양(泰陽)·태을(太乙)·덕정(德井)·내안(內安)·동현(東峴)·월사(月沙)·석도(席島) 등 10개 이가 있다.

[천동면泉洞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석탄리이다. 본래 풍천군 지역이었으나 1909년에 풍천군이 송화군에 합병되자 송화군으로 되었다.

면의 동남단에 구왕산이 솟아 서북으로 완경사되어 있고, 서부에는 원주산이 있어 그 여맥이 남북으로 뻗어 내려 산지를 이룬다. 이 두 산맥 사이에 좁고 긴 평야가 전개되어 이 면의 주요 생산 지대가 되는데, 이곳을 구왕천이 곡류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과수 등이다. 도로는 석탄리를 중심으로 풍산·은율·장연 방면으로 등외도로가 연결되어 있을 뿐이어서 교통은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석탄(石灘)·유포(乳浦)·우영(右營)·신촌(新村)·대야(大也)·포정(浦井) 등 6개 이가 있다.

[풍해면豐海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성상리이다. 본래 풍천군 지역이었으나 풍천군이 1909년에 송화군에 합병되자 이 군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남단에 관현(舘峴, 185m)과 같은 고개가 있지만, 면 전역이 대체로 평야로 되어 있고, 남천과 그 지류가 북쪽으로 흐른다. 특히, 남천의 범람원은 토지가 비옥하여 각종 농산물의 경작에 적당하다. 그러나 북서부 연안은 사빈(砂濱) 해안을 이룬다. 해안에는 초도(椒島)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 등이며, 특용작물로 잎담배와 사과·배 등의 과일을 재배한다. 서해 연안 지방의 천북리진강포에서는 어업이 활발하며, 주요 어획물은 조기·도미·까나리·조개류 등이다. 초도 부근의 해역은 각종 어족이 모이며, 특히 까나리의 어획기에는 소사리에 파시를 이룬다. 일부 주민들은 해안에서 제염업에 종사한다.

도로는 옛 풍천읍을 기점으로 송화·은율에 3등도로가 통하고 각 마을로 통하는 등외도로가 방사상(放射狀)으로 개설되어 있다.

그리고 해운으로는 진강포에 각종 선박이 기항하며, 초도의 소사포 간에 정기 항로도 마련되어 수륙교통이 편리하다. 초도에 서도등대(西島燈臺)가 있다. 유적으로는 옛 풍천읍 뒤편의 서린봉에 풍천성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성상(城上)·성하(城下)·세교(細橋)·문헌(文憲)·천남(川南)·천북(川北)·소사(蘇沙)·이현(泥峴) 등 8개 이가 있다.

[하리면下里面]

군의 서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오정리이다. 본래 풍천군에 속하였으나 1909년에 풍천군이 송화군에 합병되면서 함께 송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동북단에 취봉, 서부에 330m 높이의 산지가 있으나 이 두 산지 사이에 좁고 긴 평지가 형성되고 그 위를 남천이 흐른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조·과수 등이다.

도로는 풍천∼송화 간의 3등도로가 대체로 남천의 상류를 따라 지나며, 각 주요 마을에 연락되는 등외도로가 분기되고 있지만, 교통은 대체로 불편하다. 면 전역에 있는 하천의 물이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냉천인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장천리·오정리·청량리의 청량사지와 냉천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오정(五井)·두복(斗福)·수사(水舍)·안농(安農)·노정(蘆井)·장천(長泉)·청량(淸凉) 등 7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옛 송화군의 송화면을 비롯하여 연정면(蓮井面)·연방면(蓮芳面)의 대부분과 신천군의 초리면(草里面) 일부 및 은율군 남부면(南部面) 일부로 구역이 조정되었다. 1954년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눔에 따라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황해남도 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삼천군, 서쪽은 과일군, 남쪽은 장연군, 북쪽은 은율군과 접하여 있다. 동경 125°04′∼125°13′, 북위 38°15′∼38°28′ 사이에 있으며, 면적 152.3㎢, 인구 6만 7200여 명(1993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송화읍과 원당(院堂)·약산(藥山)·홍암(鴻巖)·수증(壽增)·용호(龍虎)·명례(明禮)·다암(多巖)·구탄(九灘)·온천(溫泉)·관양(觀楊) 등 10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송화읍이다.

이 군은 북쪽에서 서쪽에 걸쳐 언진산맥(彦眞山脈)이 뻗어 내리고 그 끝이 구월산맥(九月山脈)으로 연결되는 지세인데, 월개산(月蓋山, 505m)·구왕산(救王山, 458m)·수리봉[鷲峰, 439m]·박석산(礡石山, 596m)으로 이어지고, 은율군과의 경계에는 먹산[墨山, 656m]이 솟아 있다.

동·서·남쪽의 3면에는 높은 산이 거의 없고 200∼300m의 구릉이 노년기 지형을 이루고 있다. 장연남대천(長淵南大川)의 여러 지류가 남쪽으로 흐르면서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9.6℃, 1월 평균 기온 -7℃, 8월 평균 기온 24℃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900㎜이다. 화강편마암 또는 화강암이 지층의 중심을 이루며, 토양의 대부분은 산림갈색토로 되어 있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이나 삼엽송·밤나무 등도 많다.

구릉성 평야가 넓어서 벼농사가 권장되고 있으나, 전작(田作) 농업과 과수 경작이 농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논이 34%, 밭이 47%, 과수원이 16%를 차지한다. 벼 외에 옥수수·수수·팥·녹두 등의 산출액이 많다. 송화군의 고추는 도내에서는 생산량이 가장 많고 질도 우수하다고 한다.

특히, 과수 재배는 이웃 과일군의 영향을 받아 사과의 질이 좋고, 배·복숭아·감 등도 많이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포도주와 사과 통조림이 유명하다.

교통망으로는 은파에서 장연을 연결하는 은파선이 군의 남부를 횡단하고, 수교(水橋)에서 서해리(西海里)로 철광석 개발을 위하여 부설한 은율선은 군의 중앙을 횡단하여 교통의 간선을 이룬다. 도로는 송화를 중심으로 장연·과일·은율 등으로 연결되어 편리하다.

송화에서 남쪽으로 3㎞가량의 거리에 있는 송화온천은 황산염천으로 위장병·치질·부인병·신경통 등에 특효를 갖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월개산은 구월산을 닮은 산세로 연중 수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찾는 사람이 많다.

송화읍 교동에 송화향교가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1971년 재건되었다. 또 송화읍 가까이에 있는 수증사(修證寺)는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2)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이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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