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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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단체
불교의 교단(敎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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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불교의 교단(敎團).
내용

범어(梵語)인 상가(Samgha)를 음역하여 승가라고 하였다. 상가는 원래 인도 사람들 사이에서 공화국이나 조합을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는데, 불교에서 그 운영방법과 조직을 받아들인 뒤 교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승가는 일반적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며, 세분할 때는 칠중(七衆)으로도 구성된다.

사부대중이라고 하면 남자 수행승인 비구(比丘)와 여자 수행승인 비구니(比丘尼), 재가의 남자 신도인 우바새(優婆塞), 여자 신도인 우바이(優婆夷)를 지칭한다. 사부대중에 다시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 그리고 사미니와 비구니 사이의 단계에 있는 식차마나(式叉摩那)를 합하면 칠중이 된다.

이 중 출가 수행자들은 집을 떠나서 독신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최초의 승려들은 나무 밑이나 바위 아래, 또는 동굴 속에서 거주하였다. 큰 나무 아래는 수신(樹神)이 깃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령스런 나무 그늘은 곧잘 휴식과 명상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교단이 발전함에 따라 승려들은 차츰 승원(僧院) 안에서 공동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승원들이 세워진 장소는 촌락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이었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소음과 유혹을 피하여 가깝지 않은 곳에 세워졌고, 탁발에 지장이 없게끔 하기 위해서 멀지 않은 곳에 승원을 건립한 것이다.

그리고 세속의 직업을 멀리 하였고, 경제행위는 금지되었으며, 소지품으로는 탁발을 위한 바리와 세 벌의 옷, 손칼, 이쑤시개만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생활을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고 하여 최근까지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지켜졌고, 지금도 청빈한 일부 승려들은 이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일과는 경을 공부하거나 참선하고 염불하며, 때로는 울력(運力)이라고 하여 노동하는 것도 수행의 일부로 삼게 되었다. 또한, ≪사분율 四分律≫에 따라서 비구는 250계를 지켜야 하고 비구니는 348계를 지켜야 한다. 또 재가신도에게도 일정한 의무가 주어진다.

최소한의 조건은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살생·도둑질·사음(邪淫)·거짓말·음주를 하지 않겠다는 5계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가정을 잘 지키고, 바른 직업에 종사하고, 진실을 말하고, 남의 이익을 도모하고, 정성껏 노력하여 신뢰를 얻고, 명예와 재산을 얻으며, 획득한 재물은 자기가 사용하는 이외에 남에게도 나누어 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 교단은 철두철미한 평등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인도의 계급주의인 카스트제도(Caste制度)를 거부하고 일체중생의 평등성을 주장한 석가모니의 사상에 연원을 둔 것이며, 이와 같은 사고가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어서 불교 교단을 쉽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높은 신분을 가졌던 자라도 일단 불교 교단에 들어오면 평등하게 취급되었고, 신분이 낮은 자라도 신분이 높은 자보다 먼저 출가하게 되면 선배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중국에서도 불교 교단은 인도의 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직 중국불교 교단의 특징은 당나라의 백장(百丈)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청규(淸規)를 내세움에 따라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농사 등의 노동을 하게 되면 생물을 모르는 사이에 죽이게 된다고 하여 승려들이 탁발 또는 시주를 받아서만 생활하게 하였으나, 중국의 풍토는 보다 독특하였으므로 탁발 또는 시주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백장은 일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며, 승려들이 시주의 공양물을 함부로 축내고 바라는 그릇된 타성을 고치고자 청규를 내세웠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불교가 유입된 뒤 오래지 않아서 승단이 생겨났으나, 신라를 제외하고는 교단의 기구를 알 수 있는 기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지리적인 조건이나 불교 전파 경로 등을 미루어서 고구려에는 승통(僧統)과 도유나(都維那) 등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백제에는 남조와 일본의 경우처럼 승정(僧正)과 승도(僧都)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에는 승가를 관리하는 국통(國統)과 대국통(大國統)·대도유나(大都維那)·도유나랑(都維那娘) 등의 승직이 있었다.

국통은 승통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였는데,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惠亮)이 최초의 승통이 되었다. 또 선덕왕은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았는데, 국통과 대국통은 승단의 최고 통솔자로서 규범과 기강을 세우고 승단의 모든 업무를 총괄적으로 주관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도유나는 국통을 보좌하여 승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았으며, 최초의 대도유나는 보량(寶良)이었다. 그 당시에는 1인이었으나 647년(진덕왕 1)에는 2인으로 늘어났다. 도유나랑은 오직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승직으로서 비구니를 총괄하는 책임직이었다. 이 밖에도 국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구로서 대서성(大書省)이 있었다.

최초의 대서성으로는 550년(진흥왕 11)에 안장(安藏)이 임명되었으며, 647년(진덕왕 1)에 1인을 더 두어 2인이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승통과 대서성의 제도는 계속되었다. 785년(원성왕 1)에는 승관을 뽑았는데, 그들 구성원은 대사(大舍) 1인, 사(史) 2인이었다.

787년에는 소년서성(小年書省)을 두어 혜영(惠英)과 범여(梵如)를 법사로 삼았는데, 이는 사미의 통괄기구로 추정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국사 또는 왕사의 제도가 생겨났으며, 불교 종파인 5교9산(五敎九山)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종단 운영방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고려시대 불교 교단의 특징은 승과(僧科)의 시행에 따른 법계(法階)의 형성과 승록사제도(僧錄司制度)를 들 수 있다. 승과의 제도는 958년(광종 9) 이후에 생긴 것이지만, 이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인 921년(태조 4)에 해회(海會)를 설치, 승려를 선발하는 제도로 삼았다. 이 승과에는 예비시험과 본시험이 있다.

예비시험은 각 종파별로 실시되었던 것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본시험인 대선(大選)에 응시하게 된다. 대선은 국가에서 행하는 것으로 선종선(禪宗選)과 교종선(敎宗選)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종선에 합격하면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의 법계로 올라가게 되고, 교종선에 합격하면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首座)-승통(僧統)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 승과의 제도는 조선 중기까지 계속되었다.

승록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초기부터 보이고 있다. 양가(兩街)인 좌가승록(左街僧錄)·우가승록 또는 좌우양가승통(左右兩街僧統) 등 승록사 또는 그 일부를 가리키는 명칭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승록사에는 좌우의 양가가 있어서 그 양가에 각각 도승록(都僧錄)이 있고, 그 아래에는 부승록(副僧錄)과 승정(僧正)이 있으며, 도승록은 그 가(街)의 승려와 교단의 모든 업무를 관리하고 불교행사를 주관하였다.

또 양가의 승록 위에는 도승통이 있어서 전체 승록사를 대표하여 양가를 총괄, 관장하였다. 이 밖에도 석교도승통(釋敎都僧統)·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국통(國統) 등의 명칭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불교 교단이 크게 마비되었다. 태종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불교 탄압이 1406년(태종 6)에 전국 사찰 중 242개만 남겨 두고 나머지 사찰을 폐사로 만든 뒤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이는 불교 교단의 재정적인 힘과 승려의 수를 줄이기 위한 1단계 조치이기도 하였다. 2단계 조치로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불교 종파 11종을 7종으로 줄임으로써 종파적인 특성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세종도 즉위와 함께 태종 때 없애기로 하였던 사찰과 노비 중에서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나머지를 처리하였고, 1424년(세종 6)에는 7종이던 종단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한 뒤 전국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겼으며, 승려의 수도 선종 1,970명, 교종 1,800명으로 한정시켰다.

또한 이 때 고려 이후 계속되어 온 승록사를 폐지하고 덕행이 높은 승려로 하여금 속인이 맡던 여러 가지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종파를 폐합, 축소시키면 사찰의 수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고, 많은 사찰이 폐훼됨에 따라 적지 않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의 재산으로 몰수되었으므로 불교 교단의 세력은 자연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승록사의 폐지는 국가에서 더 이상 불교를 공인하거나 진흥시키지는 않겠다는 정책의 구체적인 표명으로서 승단과 국가와의 대화 창구를 완전히 봉쇄한 것이었다. 이후로 성문 밖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은 금지되었고 연소자의 출가는 엄금되었다.

다만, 세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에 의해서 배불정책은 잠시 외면을 당하여 승단의 권익이 옹호되고 교단은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억불정책이 강화되어 1473년(성종 4)에는 사대부 자손의 출가를 금하였고, 1475년에는 도성 내외의 비구니 사찰 23개를 헐어 버리게 하였다.

특히, 1492년(성종 23)에는 도첩(度牒)의 법을 정지시켜 일체의 출가를 막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등 불교 교단 자체를 없애고자 기도하였다. 다음 왕인 연산군 때는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혼인을 시켰으며, 비구니들을 궁방(宮房)의 노비로 삼았다.

또 선교양종의 도회소(都會所, 本寺)를 없앰으로써 승과를 실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불교 교단의 통제기관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1507년(중종 2)에 승과를 합법적으로 폐지하였다. 승과의 폐지는 결국 선종과 교종의 종단 자체까지도 그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실 승과는 각 종파별로 응시되었고 승과에 의하여 승려들의 종파가 구별된 것인데, 승과의 폐지로 인하여 불교 교단은 무종파의 혼합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1550년(명종 5) 12월에는 문정왕후가 선교양종을 다시 세우고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본사로, 봉선사(奉先寺)를 교종 본사로 정하였으며, 1552년에는 승과를 실시함으로써 교단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교단은 다시 위축되었다.

다행히 이때 배출된 인물들에 의하여 교단의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1566년(명종 21)에 양종과 승과가 폐지되고 도승법(度僧法)도 중지 당함에 따라 승려의 지위는 땅에 떨어져서 부역과 천대 속에 그 질이 형편없이 저하된 채 불교교단은 깊은 산에서 겨우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승과의 폐지는 이후의 불교를 완전히 무종파의 교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를 차별적인 종명(宗名)과 종지(宗旨)를 없앤 오직 하나의 통불교(通佛敎) 교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배척과 억압 정책에 의해서 강제로 종명(宗名)과 종단(宗團)을 박탈당한 채 무기력하게 팽개쳐진 그대로의 교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승과의 폐지와 함께 사라진 법계는 임진왜란 때 전국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부르짖고 일어선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이라는 직위가 제수됨에 따라 새로운 총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전란중에는 이 도총섭 밑에 16명의 총섭을 두어 승려들을 관장하게 하였고, 전란이 끝난 평화시대에는 이들에게 산성을 쌓고 또 지키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교 교단은 산중에서나마 그 명맥을 이어 내려갔다.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세운 4대파와 부휴(浮休) 문하에서 이룩한 7개파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 법맥(法脈)을 이어갔고, 당시 교단의 수행은 참선과 간경(看經)과 염불을 함께 하는 독특한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때의 염불은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고, 간경은 ≪화엄경≫의 연구가 중심이 되었으며, 참선은 보조국사가 주창한 경절문(徑截門) 수행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부터 불교 교단에는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의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오로지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이판승만으로 이루어졌던 불교 교단이 억불정책 속에서 국가에서 내리는 잡역과 양반의 횡포 속에 사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판승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는 대처승을 사판승이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이 사판승에 의해서 교단이 유지되었고, 이판승의 수행까지 뒷받침될 수 있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승려의 기강을 진작하고 승풍을 살피는 기구로서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있었다.

광주 봉은사, 양주 봉선사, 남한산 개운사(開運寺), 북한산 중흥사(重興寺), 수원용주사(龍珠寺) 등의 5개 사찰이 전국의 사찰을 나누어서 관할하였다.

1895년에 승려의 도성 출입이 다시 허용되고 불교에 대한 억압책이 완화되자 불교 교단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서 한국불교의 수사찰(首寺刹)로 삼고, 13도에 각각 하나씩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 사찰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는 원종(圓宗)이 생겨났고, 1911년에는 일본 종파와의 결탁을 시작한 원종에 대항하는 순수 불교종파 임제종(臨濟宗)이 생겨났다. 1911년 6월 일제가 <사찰령 寺刹令>을 발표함으로써 불교 교단은 30본산(本山)으로 형성되었다. 1915년에는 30본산연합회를 만들어서 전국 교단의 일원화된 통괄을 도모하였으나 많은 문제점만 남겼다.

또 1922년에는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각황사(覺皇寺)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보다 선명한 종명과 특징 있는 종지, 강력하고 유기적인 중앙통제적 체제가 요청됨에 따라 1941년 봄에 조계종(曹溪宗)을 만들고 태고사(太古寺)를 총본산으로 삼아 불교 교단을 통괄하였다.

1945년부터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로 교단이 오랫동안 흔들렸지만, 1962년에 불교 정화가 이룩되어 새로운 통합종단이 출범되었다. 그 뒤 군소 불교종단들이 문화체육부에 등록, 1998년판 한국불교총람에 의하면 현재 최대 규모인 대한불교조계종을 비롯한 50여 대소 중앙 종단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한국불교사연구』(안계현, 동화출판공사, 1982)
『한국불교사개론』(금영태, 경서원, 1986)
『불타의 세계』(중촌원(中村元) 저, 김지견 역, 김영사, 1984)
집필자
김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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