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최남선(崔南善)이 서울에서 창간하였다. 사장 겸 주간 최남선, 전무이사 서상호(徐相灝), 정치부장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 염상섭(廉想燮), 경제부장 김철수(金喆壽)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 신문은 주간지 ≪동명 東明≫을 내고 있던 최남선이 1923년 6월 3일 통권 41호로 마지막 호를 내고, 7월 17일 일간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한 것으로,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제일의 사명으로 내세웠다.
국한문혼용에 대형판 4면으로 1면은 12단, 1단은 124행, 1행은 14자이며, 8포인트 활자를 썼다. 조간으로 발행되었으며, 구독료는 1부에 4전, 1개월에 우송료를 포함하여 95전이었다.
이 신문은 이미 발간되고 있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와는 달리 1면을 정치면 대신 사회면으로 편집하였으며, 1면 머리에 <오늘일 래일일>이라는 시평(時評) 칼럼을 두었다. 논설은 서명을 넣어 게재하였으며, <엉석바지>라는 미국만화를 특약, 연재하기도 하였다.
발행 초기에 이미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의 정립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보천교(普天敎)로부터 전도금(前渡金) 3만 원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되어 보천교측에서 1924년 7월 9일 경영권을 인수하고, 편집 겸 발행인의 명의를 이성영(李成英)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사원들이 반발하자 7월 10일 자진휴간을 신청하였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7월 15일 조선교육협회관에서 ‘시대일보사건토의회’를 개최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보천교측의 처사를 성토하였다.
보천교측에서는 사회의 반발이 예상외로 크자, ≪대동신보 大東新報≫ 사장 박일근(朴逸根) 등에게 발행권을 양도하려 하였으나 여론에 밀려 이 밀약마저 포기하고 원상회복시켜 9월 3일자로 속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그 뒤 1925년 4월 합자회사를 조직하고 임원진을 개편, 사장에 홍명희(洪命熹), 편집국장에 한기악(韓基岳) 등으로 진용을 가다듬었다. 그 해 12월 30일 다시 발행인에 조준호(趙俊鎬), 편집인에 한기악, 인쇄인을 홍성희(洪性熹) 등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경영난으로 1926년 8월 발행이 중단되고, 무한책임사원 전원이 퇴사함에 따라 회사는 해산되고 발행허가도 소실되고 말았다.
≪시대일보≫는 1925년 대홍수 때 다른 신문들과 함께 수재민 구호운동을 전개했던 것을 비롯, 학술강연회·전국 농구선수권대회·전국 자전거대회·전조선축구전 등의 운동경기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발행되었던 신문의 일부가 현재 서울 종로도서관에 있다.
한편, 이상협(李相協)은 1926년 9월 18일자로 ≪시대일보≫의 판권을 인수, 11월 15일≪중외일보 中外日報≫로 제호를 바꾸고 창간호를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