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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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부착하여 사물을 더 잘 보이게 하거나 바람이나 먼지를 가리는 구실을 하는 광학기구.
내용 요약

안경은 눈에 부착하여 사물을 더 잘 보이게 하거나 바람이나 먼지를 가리는 구실을 하는 광학기구이다. 시력을 돋구기 위한 것에는 근시에 쓰는 졸보기안경, 원시에 쓰는 돋보기안경, 난시·노안 등에 사용하는 특수안경이 있다. 자외선과 바람에 눈을 보호하기 위한 보안용 안경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안경이 사용되었다. 안경을 소개한 문헌으로는 1560년대 초 『오봉집』에 「안경명」이 있다. 초기에는 수정을 깎아 알을 만들고, 뿔, 뼈 또는 쇠붙이로 테를 만들었다. 콘택트렌즈라 하여 알 자체를 눈 안에 장치하는 새로운 제품도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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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눈에 부착하여 사물을 더 잘 보이게 하거나 바람이나 먼지를 가리는 구실을 하는 광학기구.
내용

시력을 돋구기 위한 것에는 근시에 쓰는 졸보기안경, 원시에 쓰는 돋보기안경, 난시 · 노안 등에 사용하는 특수안경이 있으며, 적외선이나 자외선 그리고 바람이나 먼지, 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보안용안경 등이 있다.

영국의 베이컨(Bacon, L.)이 1268년 안경을 처음으로 고안하였다고도 한다. 그 이전 몽고중국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대체로 13세기 후반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경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인 중이었던 현소(玄蘇)가 나이가 많음에도 안경을 꼈기 때문에 글을 잘 읽어 많은 사람이 놀랐다고 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이를 중신들에게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전래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또 중국에서는 안경을 전한 네덜란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애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이와 같은 이름을 썼다고 하니 중국을 거쳐서 들어왔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안경을 연장자 앞에서 써서는 안 된다는 예법상의 문제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일반에게 보급되지 못하였다.

헌종의 외숙이 눈병 때문에 안경을 쓴 채 의 곁으로 지나가자, 왕이 크게 노하였다 한다. 1891년(고종 26) 당시의 일본 전권공사이던 오이시[大石正己]가 나이 많은 어른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안경을 벗어야 한다는 우리 관습을 무시하고 이를 쓴 채로 왕을 알현한 결과 우리 정부에서 일본에 정식으로 항의하였다는 기록 등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려주는 내용이다.

고종은 외교고문으로 와 있던 뮐렌도르프(Mollendorf, 穆麟德)가 평소에 안경을 쓰는 사실을 알고 1882년에 이를 써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으며, 순종 자신도 매우 심한 근시안이었으나 역시 예법에 걸려서 이를 쓰지 못하였던 것이다.

김득신(金得臣)이 그린 「팔기도(八技圖)」에 안경을 쓴 사람이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이것이 일반에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문헌에 안경을 소개한 것으로는 1560년대초 『오봉집(五峯集)』에 「안경명(眼鏡銘)」이 있다. 그 내용은 중국사람들이 안경을 사용하는 사실을 소개하고 안경을 칭송하고 있는데, 안경에 대한 비교적 초기의 기록으로 좋은 참고 자료이다.

초기의 안경알은 수정을 깎아 만들었으며 경상북도 언양(彦陽)경주에서 생산되는 수정의 품질이 뛰어나서 이를 많이 썼다. 안경테는 흔히 뿔, 뼈 또는 쇠붙이로 만들지만 특히 깊은 바다에서 사는 거북인 대모(玳瑁)의 등 딱지를 오려서 세공한 것을 고급품으로 쳤다. 이의 바탕색은 검은 빛이나 코 위에서는 흰 점이 하나하나 나타나도록 다듬었다. 뒤에 와서는 이를 이나 으로 두르는 것도 있어서 실용성보다는 일종의 장식품 구실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테 자체도 처음에는 굵었으나 뒤로 오면서 차차 가늘어졌으며, 테를 전혀 두르지 않는 무테안경까지 나왔다. 안경집은 흔히 표면이 우툴두툴한 상어껍질을 씌운 것을 썼으나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덮기도 하였으며, 이를 허리춤에 달아 무릎 쪽으로 조금 내려뜨려서 차고 다녔다.

그리고 안경집 끝에는 선추(扇錘)를 다는 일이 많았다. 선추는 방향을 보기 위한 자석을 장치한 것으로, 여기에 여름에 쓸 구급약을 굳혀 넣었다가 필요한 때에 갈아서 쓰는 일도 있었다. 안경에 다리를 붙인 것은 훨씬 뒤의 일로 초기에는 노끈을 매달아 썼다. 다리도 처음에는 중간에서 한 번 접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두루미 무릎을 닮았다 하여 학슬(鶴膝)안경이라 불렀고, 이에 대하여 지금처럼 한개의 다리로 된 것은 개화경(開化鏡)이라 하였다.

처음에 둥글던 안경알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보스턴형 · 웰링턴형 · 폭스형 · 데니즈형 등과 같은 여러 가지가 나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달걀을 뉘어놓은 것처럼 옆으로 걀쭉한 것을 ‘샐쭉경’이라고 따로 부른 일도 있었다.

알은 광학유리로 만든 것을 많이 썼으나 요사이에는 플라스틱 제품도 생산된다. 또 콘택트렌즈라 하여 알 자체를 눈 안에 장치하는 새로운 제품도 등장하였다.

참고문헌

『도설 한국어의 발굴』 25(이훈종, 문학사상, 1983.2.)
『개화백경』 5(이규태, 신태양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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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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