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은율, 안악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은율, 안악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황해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재령강을 경계로 황주군·봉산군·재령군, 서쪽은 은율군, 남쪽은 신천군, 북쪽은 대동강 하류를 경계로 평안남도 용강군·진남포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5°19′∼125°39′, 북위 38°26′∼38°43′에 위치하며, 면적 851㎢, 인구 10만 9926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8개 면 113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안악읍 소천리이다.

자연환경

군의 지세는 구월산(九月山, 954m)의 여맥과 재령강 및 그 지류들로 형성되어 있다. 구월산에서 뻗은 산줄기인 삼봉(三峰, 614m)이 서부에 높이 솟아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부·동북부·북부의 세 갈래로 산줄기가 나뉘면서 양산(楊山, 379m)·검산(劒山, 253m)·봉산(烽山, 364m)·고남산(高南山, 395m)·양담산(兩潭山, 235m) 등의 산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서강(西江)·직천(稷川)·수합강(水合江) 등이 북·동류해 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재령강으로 흘러든다. 북쪽은 대동강의 하류로서 동북부에서 재령강이 이에 합류하며, 양대 하구가 깊은 내해만(內海灣)을 이룬다.

이 만에는 저도(猪島)·쇄염도(鎖鹽島)·청태도(靑苔島) 등의 섬이 있다. 하천유역은 퇴적으로 인해 넓고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북부의 해안은 갯벌이 넓어 간척지로 개발된다.

지질은 회색화강편마암·화강암·상부대동계(上部大同系) 제4계층이다. 기후는 산악·평야·해안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여름과 겨울의 경우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대체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기온 10.9℃, 1월 평균기온 -6.1℃, 8월 평균기온 25.6℃이며, 연강수량은 2,660㎜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안곡면 장월리 패총과 안악읍 판오리에서 신석기 초기 단계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류가 발굴되어, 안악이 일찍부터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두 곳이 대원면 복사리에서 발굴되었고, 곳곳에서 고인돌과 석검·석촉·반월도·돌도끼·돌화폐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사리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유물도 다수 출토되어 문화가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 무렵의 지명이 아사달(阿斯達)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고, 삼국통일 후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757년(경덕왕 16)양악군(楊岳郡)으로 편성되었는데, 양악을 고구려 때의 지명으로 보기도 한다.

벽화로 유명한 대원면 상산리와 용순면 유순리의 안악1·2·3호 고분은 4세기경의 고구려 유적으로서 당시의 문화수준을 대변하며, 복사리에서도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발굴되었다. 특히 3호분은 81㎡의 벽면과 58㎡의 천장이 각종 인물화·풍속화로 차 있어 고구려의 풍속은 물론 음악·가옥구조 등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종래 동수묘(冬壽墓)라는 해석에 대해 미천왕의 능이라는 학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고 려]

왕건(王建) 세력이 궁예(弓裔)에 협력함으로써 905년을 전후해 태봉의 판도에 편입되었으며, 지명이 안악으로 고쳐진 것도 이 때로 짐작된다. 1018년(현종 9)풍주(豊州)의 속현이 되었는데, 1106년(예종 1) 일정한 주거가 없이 방랑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주민을 안무하기 위해 비로소 감무가 부임하였다.

1259년(고종 46)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항복한 뒤 1270년(원종 11) 원나라가 설치한 동녕부(東寧府)에 이속되었다가 8년 만에 수복되었다. 14세기 중엽 이후에도 홍건적·왜구 등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입었다. 1348년(충목왕 4) 문하찬성사 황순(黃順)의 처향(妻鄕)으로 보고되어 군으로 승격되고 지군사(知郡事)가 부임하였다.

[조 선]

1413년(태종 13) 군으로 확정되어 군수가 부임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의 호구는 991호에 3,703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조선 전기에도 주민의 생활이 크게 펴지지 못했으며, 16세기 중엽에는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임꺽정의 주요 활동근거지가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1589(선조 22)∼1608년의 기간 외에도 여러 차례 현으로 강등되는 곡절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는 구월산에 주둔하던 왜군이 명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자, 의병을 일으켜 이를 공격해 공로를 세웠다.

17세기에도 구월산에 산적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1684년(숙종 10) 신천에 배치되어 있던 중영장(中營將)이 안악으로 옮겨지고, 중군(中軍)이 두어져 토포사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 벼와 목화재배를 중심으로 농업이 크게 발달해 간척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평안도 지역과의 교역도 많아졌다.

1759년(영조 35) 당시 모두 18방 80리로 편성되어 있던 것으로부터 군세가 매우 커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호구도 1만 4509호에 5만 1247명으로 도내에서는 해주 다음으로 많았다. 1828년(순조 28)의 인구는 5만 3546명이었다.

[근 대]

1894년 이 군의 동학군은 해주·신천 등지의 동학군과 함께 패엽사(貝葉寺)에 모여 웅거했으나,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혁명적 기운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통해 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면학회(勉學會) 등 교육·문화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해져 갔으나, 1910년 안명근(安明根)의 총독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1911년 1월 일제가 이른바 ‘안악사건’을 조작함으로써 다시 타격을 받았다.

당시 김구(金九)·김홍량(金鴻亮)·김용제(金庸濟)·최명식(崔明植) 등 160여 명의 인사가 투옥되어 그 해 가을에 일어난 105인사건의 전조가 되었다. 김구가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원으로 재직했던 인연으로 김기형(金基瀅)·나태섭(羅泰燮)·오면식(吳冕植)·최익형(崔益馨) 외에도 많은 이 지역 출신 인사가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1935년 당시 1개 읍 8개 면 113개 이로 편성되었고, 1942년에 호구는 1만 9030호에 10만 4572명이었다.

유물·유적

이 곳의 유물·유적 가운데는 1949년 봄 대원면 상산리 뒤편의 구릉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이 두드러진다. 이 군내에서 모두 3기의 고구려고분이 발굴되었는데 발굴 순위에 따라 안악1호분·안악2호분·안악3호분으로 이름을 붙였다.

1호와 2호의 고분구조는 종래의 고분과 같은데, 전각도(殿閣圖)·행렬도(行列圖)·여인군상도(女人群像圖) 등의 그림과 구름·불길·연꽃 등의 문양화(紋樣畫)가 곁들여져 있다. 부장품으로 관에 박은 못, 금제장식품, 철창(鐵槍) 등이 출토되었다.

동수묘라고 불리는 3호분은 용순면 유순리 동쪽 언덕에 있는데, 이 곳에서 내려다보면 재령평야가 널려 있고 동남쪽에 장수산이, 서쪽에 구월산의 연봉이 바라다보여 경승절가(景勝絶佳)의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이 분롱(墳壟)의 남쪽은 도굴되어 형태가 바뀌었으나 뒷면은 방대원형(方臺圓形)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3개의 벽화고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이 군의 객사(客舍)는 1368년(공민왕 17)에 창건하고 1379년(우왕 5)에 좌우행랑 등을 세운 57칸의 건물이었다. 아사(衙舍)는 1403년(태종 3)에 창건하고 1514년(중종 9)에 다시 지은 88칸의 건물이었다.

아사 부근에 있던 이요루(二樂樓)는 1493년(성종 24) 군수 유효산(柳孝山)이 창건하였다. 객사 서쪽에는 군수 심광문(沈光門)이 지은 청심당(淸心堂)이 있었으며, 동헌 옆에는 군수 정숙은(鄭叔垠)이 창건한 우련당(友蓮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없다.

안악읍 북쪽 양산대 기슭에 있는 안악향교는 1368년(공민왕 17)에 창건한 것으로 1430년(세종 12)에 동재·서재를 짓고 1441년에 명륜당과 동무(東廡)·서무(西廡)를 지었는데 지금도 옛 모습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향교 앞에 있는 문필봉에는 필봉정(筆峰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문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사달을 이 지역으로 보는 데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한 성초곶(省草串)·도곶(桃串)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안곡면 제중리에는 제량당(濟良堂)이라는 신당(神堂)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고려 말의 최영(崔瑩)을 모시면서 한식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는 이 군뿐 아니라 인접한 황주군·봉산군·신천군과 평안남도 중화군·용강군·강서군 등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동창포에서 농악대가 징을 치고 피리를 불며 출발하면 문산·서하 쪽에서 가면을 쓴 농악대가 맞받아 나오며 상사리 제량당에서 합류해 큰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참례인들은 저마다 화상(畫像)을 그려 그 곳에 걸어 놓고 한 해의 길복을 빈다.

이 날은 모여드는 군중마다 떡을 푸짐하게 장만해 서로 나누어 먹고 어린이들에게도 나누어주며, 복을 주워담는다는 오색바구니, 운수대통의 뜻이 담긴 대통, 이(利)를 잡는다는 비유인 참빗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제량당은 절양해(絶瀼海)에서 전음(轉音)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근처에 있는 절양해가 중요한 뱃길로 알려져 있어, 수로의 안전과 부녀자의 임신을 비는 사당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안악향교가 있었는데, 1368년(공민왕 17)에 건립되고 1430년(세종 12)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증축되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1898년에 문면 민화리에 천주교 부속 봉삼학교(奉三學校)가 남녀공학으로 개교하였다. 안신학교(安新學校)는 1902년 안악읍에서 개교해 1920년 판팔리로 이전했고, 1925년 6년제의 안신사립국민학교로 인가되었다.

1905년에 양산학교가 안악읍 향청 자리에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양산중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11년 안악사건으로 탄압을 받아 모두 폐교되었으나, 그 동안 황해도 지역의 신문화·사상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1900년 안곡면 학포리에서 명진학교(明進學校)가 개교했으며, 1904년 용문면 동창리의 배영학교(培英學校), 1906년 대행면 한봉리의 한봉학교(鷳峰學校), 그 밖에 1900년대 초 서하면 상촌리의 양산북학교(楊山北學校), 은홍면 온정리의 선명학교(善明學校) 등이 개교하였다.

공립학교는 1905년 〈보통학교령〉 이후 안악읍의 안악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각 면에 1개교씩 설립되었다. 1926년 군내 유지들에 의해 안악농업보습학교(安岳農業補習學校)가 개교했고, 1943년 안악농업학교로 바뀌었다. 1938년 안악중학교, 1940년 안악고등여학교가 안악읍 소천리에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공립국민학교 10개교, 사립학교 7개교, 간이학교 5개교, 중학교 2개교, 농업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3개, 천도교교당 1개, 천주교성당 2개, 개신교교회 14개가 있다.

산업·교통

농경지가 넓고 비옥해 논농사와 밭농사가 모두 활발하다. 1935년 현재 경지면적은 238.15㎢로 경지율은 약 33%이며, 이 중 논이 127.33㎢로 45%, 밭이 155.82㎢로 55%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팥·조 등이다. 고구마·배추·무·호박·오이 등의 소채류, 사과·배·복숭아·포도 등의 과실과 면화의 생산이 많고 누에치기도 활발하다.

광업으로는 용문면 석양리·상덕리의 철광산이 유명했는데, 갱내에 물이 괴어 1926년에 폐광되었다. 또한 용순면 옥정리, 대원면 상산리, 서하면 상촌리에 운모광산이 있다.

양산 뒤쪽에 갈연석이 매장되어 있으나 본격적인 채굴은 하지 않고 있다. 공업은 모·면·마포 등의 방적이 발달해 1918년 기업조합(機業組合)을 형성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상업은 5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안악읍에서는 옷장·훈련장·새장 등이 2·7일에 번갈아 열렸으며, 대원면 복사리장은 1·6일, 용문면 동창리장과 대행면 한봉리장은 3·8일, 서하면 초정리장은 4·9일, 은홍면 온정리장은 5·10일에 각각 열린다. 특히 안악읍과 재령강변의 동창리장이 중심적인 구실을 한다.

교통은 안악읍과 저도간의 2등도로가 남북으로 통해 남쪽으로는 재령·해주에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진남포시와 연결되며, 은율면 장연-온정리-안악읍-신천을 연결하는 3등도로가 군의 서남부를 지나고, 등외도로가 각 지역에 연결되어 편리한 편이다. 다만 동부는 하천으로 인해 화물수송이 적합하지 않으므로 이들 도로를 이용해 장연선·경의선 등과 연결된다.

수운으로는 저도(猪島)·치하포(鴟河浦)·동파리·동창포·당전포 등을 연결하는 수로가 있다. 저도는 대행면 저도리에 있는 항구인데, 본래는 섬이었으나 1930년대 초기의 간척지공사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항구로서의 구실뿐 아니라 바다 건너 남포와 황해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다.

저도항을 거쳐 황해도로 들어오는 물동량은 1935년 현재 입하량보다 출하량이 거의 20배나 많을 정도로 안악지방 산업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저도-온정리-안악읍-신천을 잇는 도로는 길이가 48㎞나 되므로 수로로 재령군 하호면의 신환포를 이용하는 것이 능률적이라고 해 크게 각광받지는 못한다.

대원면재령강과 월당강(月唐江)의 합류지점에 있는 성초곶(省草串)은 나루터로, 물이 산기슭을 에워싸고 돌면서 생기는 흰 거품과 주위의 산수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우며, 가뭄이 들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망우대(望雨臺)는 성초곶에서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쉬던 조망대이다.

한편, 성초곶은 남쪽으로 8㎞ 떨어진 곳의 도곶과 더불어 옛날부터 신제(神祭)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초곶과 도곶을 특별히 ‘아사진(阿斯津)’이라고 해 신성한 곳임을 표시했는데, 우리 나라 지명 중 아사진의 칭호가 붙은 곳은 은율군의 송곶(松串)과 더불어 모두 세 곳뿐이다.

이 세 곳은 옛날에 아사달산으로 불리던 구월산 기슭에 있어, 단군왕검이 단군조선을 건국해 지금의 평양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약 2,000년 동안 다스렸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병도(李丙燾)는 『한국사』 고대편에서, 아사진은 ‘아사달의 나루’라는 뜻으로 안악이 아사달의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구월산 중심의 안악 장장평(庄庄坪) 일대는 평양 아사달의 새로운 지배씨족에 밀려 남하한 구지배씨족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서하면 초정리에 있는 안악초정(安岳椒井)은 해변에서 솟아나는 일종의 약수로, 물이 맑고 차며 신맛이 강해 이 물에 목욕하거나 물을 마시면 위장병·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은홍면 온정리에 있는 안악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북쪽 8㎞ 지점에 있는 이 곳에 와서 약수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읍·면

[안악읍安岳邑]

군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59.92㎢, 인구 2만 5220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비석리이다. 본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읍내면(邑內面)이었으나 곧 안악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구월산맥의 동부 말단이 이 읍에 이르러 양산·복두산(福頭山, 153m) 등을 기복시켰을 뿐이며, 그 밖의 지역은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재령나무니벌’에 연속된다.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경작에 적당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팥·청마 등이며, 그 밖에 포도·복숭아 등의 과일과 면화의 생산량도 많다.

교통은 안악읍내를 중심으로 재령·해주·북창포 방면의 2등도로, 신천 방면의 3등도로가 나 있고 그 밖의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방사상으로 통해 편리하다.

명승지로는 양산이 있고, 양산에 치마바위·범바위 등의 기암과 고정사·수도암 등의 사찰이 있다. 연곡리에는 연등사가 있다. 남산(南山)의 수박재는 지금은 공원이 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 중학교 2개교, 간이학교 1개교, 농업학교 1개교가 있다.

비석(碑石)·소천(小川)·서산(瑞山)·수삼(壽三)·훈련(訓鍊)·판팔(板八)·신장(新長)·연곡(燃谷)·남암(南巖)·유성(柳城)·평정(坪井)·사현(沙峴)·어은(漁隱)·용석(龍石)·남정(南井)·해창(海倉)·차신(車新)·판오(板五)·판육(板六)·판칠(板七) 등 20개 이가 있다.

[대원면 大遠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5.11㎢, 인구 1만 773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산리이다. 서부에 월암산(月巖山, 150m), 남부에 월호산(月扈山, 160m) 등의 구릉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야이며 재령평야에 이어진다.

남쪽의 서강은 북쪽으로 흐르면서 한천 등의 지류를 받아들여 재령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북부 문산면과의 경계에는 직천이 동쪽으로 흘러 재령강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유역에 발달한 평야는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시설도 잘 되어 있어 농산물의 재배에 적합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왕골 등이며, 특히 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광산으로는 상산리에 운모광이 있다. 교통은 안악∼재령간의 2등도로가 남부를 횡단하고, 그 밖의 주요 마을에 연결되는 도로가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상산리에서 제1·2호 안악고분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고분의 구조이며 전각도·수렵도·행렬도 등의 벽화가 있다. 명승지로는 성초곶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덕산(德山)·상산(上山)·월암(月巖)·가양(可陽)·송산(松山)·복사(伏獅)·굴륭(屈隆)·엄곶(嚴串)·하금(下金)·원룡(元龍)·당오(堂梧)·봉성(鳳城)·당전(堂田)·망암(望巖) 등 14개 이가 있다.

[대행면大杏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8.34㎢, 인구 1만 183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한봉리이다. 남부에 고남산, 서북부에 양담산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이고, 간혹 100m 내외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다.

동부에는 산촌천(山村川)과 그 지류가 북쪽으로 흐르고, 서부에는 여러 작은 내가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들 하천유역에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시설도 잘 되어 있어 경작지로 적합하며, 특히 산촌천에 큰 저수지가 있다.

북쪽에는 양담산의 말단이 바다에 임박해 염곶(鹽串)이 된다. 염곶의 동부·서부는 만을 이루지만 연안은 거의 갯벌로 되어 있다. 염곶 동쪽 대안에 있는 저도는 염곶-쇄염도-북도-가후산을 연결하는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 등이다. 북해안이나 대동강 하구에 사는 주민들은 어업에 종사하며, 새우·조개·민어 등을 어획한다. 도로는 재령읍에 이르는 2등도로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북쪽 저도에 도달하고, 이 도로 도중에서 장연 등 여러 주요 마을로 통하는 등외도로가 갈라진다. 해상에는 염곶-저도-진남포간을 정기적으로 선박이 왕래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생근리에 문화유씨(文化柳氏), 한봉리에 성주김씨(星州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한봉(鷳峰)·월촌(月村)·석운(石雲)·적둔(滴屯)·추산(楸山)·굴산(屈山)·창운(倉雲)·저도(猪島)·송당(松堂)·생근(生芹)·광풍(光楓)·풍곡(楓谷) 등 12개 이가 있다.

[문산면文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2.10㎢, 인구 8,26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강리이다. 면의 중앙부 북쪽에 오룡산(五龍山, 100m)이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를 이루어 재령평야에 이어진다.

특히 남단에는 직천, 북단에는 수합강이 흘러 재령강으로 들어가는데,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평야는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콩 등이며, 사과·배·복숭아·포도 등의 과실도 생산된다. 교통은 금강리를 기점으로 해 등외도로가 여러 주요 마을에 연결되나 대체로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금강(金岡)·원성(遠星)·안랑(安浪)·송간(松間)·유성(楡城)·감문(甘門)·상당(上堂)·신당(新唐)·신촌(新村) 등 9개 이가 있다.

[서하면西河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91.19㎢, 인구 9,80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정리이다. 남부 경계에 150m의 구릉을 비롯해 전역에 100m 내외의 구릉들이 기복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이다. 하천은 동남단의 청천(淸川), 서단의 산촌천이 모두 북쪽으로 흐르는데, 특히 청천 하류에는 갯벌이 넓게 전개된다.

가후산(家後山, 48m)의 북쪽 기슭이 해안에 면해 반도상(半島狀)을 형성한다. 이 반도 맞은편에 있는 평안남도 진남포와의 사이는 약 2㎞ 정도이다. 반도의 동쪽은 안석(雁潟), 서쪽은 압석(鴨潟)이라 하며, 연안은 모두 갯벌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메밀·면화 등이다.

긴 해안선에 비해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적다. 광업으로는 상촌리에 운모광이 있다. 교통은 초정리를 기점으로 해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불편한 편이다. 명승지로는 초정리에 안악초정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가 있다. 초정(椒井)·상요(上要)·중기(中基)·복두(卜頭)·상보(上保)·중도(中島)·상촌(上村)·덕일(德日)·매천(梅泉)·신장(新長) 등 10개 이가 있다.

[안곡면安谷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96.78㎢, 인구 1만 304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학포리이다. 남부에 100m 내외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야이다. 특히 서부를 북류하는 청천과 남동단의 경계를 흐르는 수합강 유역은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북쪽 해안일대는 갯벌이 펼쳐져 있고 청태도가 가로놓여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 등이다. 교통은 학포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대동강·재령강을 이용한 수운도 있지만 불편하다. 명승지로는 구절벽이 있으며, 제량당의 제사는 인근지방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학포(鶴浦)·금정(金亭)·상룡(上龍)·봉곡(鳳谷)·제중(濟中)·동양(東陽)·상사(上寺)·용천(龍泉)·동파(東波)·만월(萬月)·중하(中下)·신덕(新德)·당석(堂石)·학산(鶴山)·장월(長月)·북삼(北三)·낙암(洛巖) 등 17개 이가 있다.

[용문면龍門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5.64㎢, 인구 6,60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창리이다. 서부에 100m 내외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평지로 재령평야에 이어진다. 동부에 재령강의 지류인 수합강이 흐르며, 유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농경지로 적합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 등이다. 석양리에서 상덕리에 걸쳐 적철광(赤鐵鑛)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교통은 동창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마을로 통하는 등외도로가 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2개교가 있다. 동창(東倉)·석양(石陽)·상덕(上德)·상무(上茂)·송곡(松谷)·민화(玟花)·용운(龍雲)·신오(新梧)·덕학(德鶴) 등 9개 이가 있다.

[용순면龍順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4.59㎢, 인구 7,08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설리이다. 서북단에 검산·불치(佛峙, 107m)의 구릉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평지로 안악평야에 이어진다. 북부 및 남동부를 서강의 지류가 흘러 경작지의 관개용수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콩·면화·메밀 등이다. 부업으로 기직(機織)과 고공품(雇工品)을 만들어 낸다. 광업으로는 옥정리에 운모광이 있다. 교통은 안악∼신천간의 3등도로가 면의 거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이 도로에서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나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유순리에 고구려고분인 제3호안악고분이 있는데, 부부상(夫婦像)을 비롯해 문인·관리·하인 등의 벽화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유설(柳雪)·가정(柯亭)·옥정(玉井)·유순(兪順)·신율(新栗)·노암(路巖)·장산(長山)·신곡(新谷) 등 8개 이가 있다.

[은홍면銀紅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4.19㎢, 인구 1만 34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온정리이다. 구월산·오봉산 산맥의 한 줄기는 동쪽으로 뻗어 삼봉이 솟아 있고,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뻗어 봉산이 솟아 있다.

두 지맥이 모두 동북쪽으로 경사지는데, 중앙의 양수고개[兩岫峙]가 분수령이 되어 동북쪽으로는 청천이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산촌천이 흐른다. 하천유역에 소규모의 경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산세가 험해 밭농사를 많이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콩·조 등이며, 포도·복숭아·배 등의 과실도 생산한다. 보광리·학산리·매석리에는 삼림이 무성해 침엽수의 모범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교통은 온정리를 중심으로 안악읍 및 북창포에 이르는 2등도로와, 장연을 잇는 3등도로가 나 있고, 용문·문화 방면으로 통하는 등외도로가 있어 편리한 편이다.

명승지로는 온정리의 안악온천이 있는데, 수온 80℃의 탄산성(炭酸性) 온천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 사립학교 1개교, 간이학교 1개교가 있다. 온정(溫井)·광석(廣石)·원봉(院鳳)·내평(內坪)·상홍(上紅)·신창(新倉)·운봉(雲鳳)·약봉(藥烽)·청천(淸川)·매석(梅石)·용덕(龍德)·두양(斗陽)·학산(鶴山)·보광(寶光) 등 14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신천군(信川郡)의 산천면(山川面)·용진면(用珍面)·노월면(蘆月面)과 안악군의 안악읍을 비롯해 용순면(龍順面)·대원면(大遠面)·문산면(文山面) 등으로 개편되었다. 1954년 황해도를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나눔에 따라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황해남도의 북부에 위치하며, 서쪽은 은율군·삼천군, 남쪽은 신천군, 북쪽은 은천군, 동쪽은 재령강과 그 지류인 서강(西江)을 사이에 두고 황해북도 황주군·사리원시·봉산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5°16′∼125°39′, 북위 38°24′∼38°37′에 위치하며, 면적 328㎢, 인구 10만여 명(199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안악읍과 연등(淵登)·평정(坪井)·판륙(板六)·남정(南井)·금강(金岡)·유성(楡城)·신촌(新村)·엄곶(嚴串)·구와(舊瓦)·복사(伏獅)·봉성(鳳城)·대추(大楸)·원룡(元龍)·굴산(屈山)·덕성(德城)·오국(五局)·노암(路巖)·마명(馬鳴)·경지(境地)·월산(月山)·용산(龍山)·한월(漢月)·월지(月池)·강산(江山)·패엽(貝葉)·월정(月精) 등 1개 읍 26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안악읍이다.

멸악산맥이 군의 중앙을 횡단하나 침강과 함께 심한 침식을 받아 준평원을 이루며 200∼300m로 낮아진다. 그러나 서쪽 군계에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달리는 구월산맥(九月山脈)과 마주치는 결절이 구월산(954m)이 된다.

구월산맥은 오봉산(五峰山, 859m)·아사산(阿斯山, 587m) 등으로 이어지며 멀리 월개산(月蓋山)·박석산(礴石山)으로 뻗어 내린다.

동쪽과 남쪽은 재령강의 지류인 수합강(水合江)·직천(稷川)·서강 등에 의해 개석된 준평원으로 월호산(月扈山, 160m)을 비롯한 잔구가 남아 있는 정도이다. 지질은 두꺼운 화강암층 및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졌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0.5℃, 1월 평균기온 -6.8℃, 8월 평균기온 25℃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00㎜로 대동강 하구 소우지역에 가깝다. 토양은 산림갈색토와 충적토 등이 주종을 이룬다.

재령평야의 일부로서 서강·직천·합수강 등이 그물모양으로 흐르고 관개시설이 정비되어 벼·보리·밀·옥수수·콩·팥 등의 생산량이 많으며, 양잠업도 발달하였다. 이 군에는 1926년에 폐광된 철광산이 많은데, 그 중 일부에서는 현재도 철광석이 채굴되어 송림(松林)의 황해제철소로 보내진다.

정미·제분 등의 소규모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수지그릇·면수예품·초물공예품·가죽제품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교통망으로는 안악을 중심으로 재령·신천·남포·사리원과 연결되는 도로가 통해 있다.

구월산(북한 명승지)은 단군이 강림(降臨) 탄생한 성지로 단군대·삼성사(三聖祠)가 남아 있다. 우리 나라 33본산(本山)의 하나였던 패엽사(貝葉寺, 북한 보물급 문화재)는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월정사(月精寺, 북한 보물급 문화재)·정곡사(停穀寺) 등은 대부분 불탔으나 이 중 일부는 재건된 것도 있다.

유적으로는 안악읍에 안악1·2·3호 고분이 있다. 1949년에 발굴된 1호고분(북한 국보급 문화재)은 대추리에 있고, 2호고분(북한 국보급 문화재)은 ‘함박뫼’라고도 부르는데 봉성리에 있으며, 3호고분(북한 국보급 문화재)은 유성리에 있다.

고구려시대 우리 조상의 뛰어난 예술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안악고분은 6·25전쟁 때 파괴를 면해 보존되고 있다. 안악향교는 1368년(고려 공민왕 17)에 세워졌으며, 차신리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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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택리지』
『대동지지』
『안악읍지』
『한국사』-고대편(이병도, 진단학회, 1959)
『황해도지』-명승고적편(황해도, 1970)
『안악군지』(안악군지회, 1976)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1)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한국고고학지도』(한국고고학회, 1984)
『고려사의 제문제』(김갑동, 삼영사, 1987)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이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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