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위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구에서 일본관청 파괴를 모의하였으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3년(고종 20)
사망 연도
1949년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구에서 일본관청 파괴를 모의하였으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0년 8월 나라를 잃게 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뜻을 둔 맹보순(孟甫淳)·양기탁·이병옥(李秉玉) 등 10여 명과 수시로 회합,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본방략을 수립하고 그 기반 조성을 위하여 산업을 일으키며 교육을 진흥시켜 나갔다.

1919년 음력 9월경 경상북도 영천역 앞에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권태일(權泰鎰)과 협의하고 『독립신문』 경고문 등을 허병률(許秉律)·조선규(趙善奎) 앞으로 발송, 독립의식과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한 대구 시내로 잠입하여 주요 지점에 경고문을 첨부, 제시하고 남문시장에서 동지들과 일본관청에 폭탄을 투척,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실행을 위하여 폭탄을 제조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할 결심하에 허병률 등으로 하여금 군자금을 모금하게 하여 8,000원을 지참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 재정난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 조선규를 설득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 협조하게 한 뒤 군자금을 모금하도록 방법을 알려주어 740원을 조달하였는데 이 금액은 그 자신이 상당량을 헌납한 것 같다.

1921년 1월 하순경 대구에서 권충락(權忠洛)과 같이 군자금 모금을 협의한 뒤 경상북도 달성군의 부호 최재교(崔在敎)를 협박하여 3만원을 요구하였으나 그 중 일부만 수령하였다. 1922년 5월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잡혀 그해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국, 1934)
「대구지방법원판결문(大邱地方法院判決文)」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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